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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에 관한 새 관점


첫째, 예수께서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이전에 그분의 첫 제자가 된 자들에게 이미 영향을 끼쳤다. 이 영향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영향이 경험되기 전에 이미 지속성을 가진 형태로 안정된 예수 전승이 처음 형성될 때 표현되었다. 둘째, 구두 전승의 구전 공연과 전수는 예수께서 첫 제자들에게 끼친 원래의 영향이 구두 전승을 통해서 계속 표현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청중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이에 맞추어 공연이 달라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게 공연이 달라졌기 때문에 계속 표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공관복음서에 담긴 예수 전승의 지속적인 형태가 지금 보여주듯이, 예수 전승은 고정되거나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특성과 효과에 있어서 살아있는 것이었다. 셋째, 예수 전승 전반에 거쳐 나타나는 특징적 예수의 모습은 예수께서 그분의 사역 기간에 제자들에게 끼친 인상을 명확하게 암시한다. 영국 신약학계의 원로 다드(C. H. Dodd)가 그의 중요한 마지막 저서에서 말하였듯이 "첫 세 복음서는 일단의 말씀들을 대체로 아주 일관성 있고, 매우 앞뒤가 맞고, 게다가 아주 독특한 방식, 문체, 내용으로 전한다. 따라서 어떤 합리적인 비평가도 우리가 여기에서 한분의 독특한 교사의 사상이 반영된 것을 발견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들은 기껏해야 개개의 말씀들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하여 판단 유보를 할 수 있을 뿐이다."[각주:1]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려지는 예수에 관한 묘사는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의 묘사 뒤에 공관복음 전승의 특징적 예수 외에는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란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 전승을 통해서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긴 분외에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갈릴리인 예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이 만나기 원하는 역사적 예수는 분명히 이러한 예수이다(즉 공관복음 전승에 나타난 특징적 예수이며 제자들에 강한 인상을 남기고 신앙을 일으킨 역사적 예수이다 -역주). 역사학자는 그보다 못한 것으로 만족해야만 하는가?

 첫째, 예수 전승으로부터 특정상 문자적이기보다는 명확하게 구전적인 예를 찾을 수는 없다. 이것은 물론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전승이 문자적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어쨋든 결정적으로 "구전적이되 문자적이지는 않다"고 선언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특정한 전승의 견본은 없다.
 둘째, 예수 전승의 전수의 초기 단계에 관한 한 구전성의 추정을 피할 수 없다. 학자들은 예수 전승이 애초부터 문자적 형태를 가졌다고 주장하거나, 평행된 전승들 사이의 차이가 얼마나 크든지 간에 모두 문자적 편집이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잇다고 주장한다. 공관복음 전승 안에서의 차이점들이 문자적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당분간 부정하지 않는다. 나의 질문은 그것들이 반드시 그렇게 설명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셋째로, 나는 두 문서 가설이 본질적으로 정확하다는 것을 여전히 확신한다. 즉 증거를 살펴볼 때, 마가복음이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사용한 문서(Q)가 있었다는 가설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마가복음 8:34-37과 그 평행구절들(제자도의 댓가), 13:28-32과 그 평행구절들(무화과나무 비유)과 같은 구절들을 관찰하면,[각주:2] 그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Q 자료에도 유사한 평행구절이 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3:7-10//누가복음 3:7-9의 세례 요한의 설교와 마태복음 12:43-45//누가복음 11:24-26의 돌아온 악령들의 비유이다.

 이러한 구절들의 경우에도, 문자적 의존관계가 다른 판들 사이의 유사성의 정도에 관한 유일하거나 가장 명확한 설명인가?
 1. 삼중 전승. 삼중 전승(세 권의 공관복음서 모두에 담긴 공통 전승 -역주)에서 우선 마가복음 9:14-27과 그 평행구절들에 담긴 간질병 들린 소년 이야기를 다루자. 분명 이야기에 핵심에 해당하는 18-19, 25절에 나타난 일군의 일치가 나타나고, 나머지 부분에는 큰 변이가 있음에 주목하자.

 예를 하나 더 추가하여, 마가복음 16:1-8과 평행구절들에 담긴 빈 무덤을 발견하는 이야기의 변이를 살펴보자.

 이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이 이미 마가복음과는 다른 판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고 이러한 다른 판들을 따랐음을 뜻한다. 아니면, 구전 공연의 특징을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우리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마가복음으로부터 알려진 이야기를 구전의 방식으로 (즉 편집자로서가 아니라 이야기꾼으로서) 재생한 결과로 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문자적 편집보다는 이차적 구전성이 작용한 증거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Q전승? Q자료의 3분지 1이상은 40%미만의 문자적 일치를 보인다.[각주:3] 마태복음 5:39b-42; 누가복음 6:29-30(다른 뺨 돌려대기)/ 마태복음 10:34-38; 누가복음 12:51-53과 14:26-27(분열된 가족)/ 마태복음 18:15, 21-22; 누가복음 17:3-4(일곱 번 죄 용서하기)를 살펴보자.


 3. 예배 의식 전승 예배 의식 전승 중에 가장 명확한 예는 주의 기도와 최후의 만찬에서의 말씀이다. 두 가지 전승들은 복음서 본문으로부터 추론될 뿐 아니라 디다케 8.2와 고린도전서 11:23-26에서 확증된다. 그렇다면 주의 기도 전승 속에 담긴 변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또한, 한편으로 마태복음/마가복음에 다른 한편으로 누가복음/바울서신에 담긴 최후의 만찬 전승에 담긴 변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태복음의 저자가 오로지 Q를 읽었기 때문에 주의 기도를 알았다고까지 제안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역사적 상상의 실패인가? 누가는 오직 그가 마가복음에서 최후의 만찬 말씀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았는가?
 4. 문체적 특징 구두 전승의 특징 중에 가장 잘 입증된 것은 3의 유형이다.즉 세 개의 일화나 실례에 토대한다는 것이다. 이렇나 유형은 구전 공연자가 예나 일화를 공연하다가 종종 상당히 즉흥적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바꿀 수 있게 한다. 예수 전승 중에 3의 유형을 따르는 것만을 두 개를 언급하면 첫째는 마태복음 22:5-6; 누가복음 14:18-20(큰 잔치 또는 임금의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의 변명)이다. 이들 사이에는 매우 적은 문자적 일치가 나타난다.[각주:4]

 둘째는 마가복음 14:66-72와 그 평행구절들에 나오는 베드로와 삼중 부인 기사이다.
  1. C. H. Dodd, The Founder of Christianity (London: Collins, 1971), 21-22 [본문으로]
  2. R. Morgenthaler, Statistische Synopse (Zürich, Stuttgart: Gotthelf, 1971), 239-243 [본문으로]
  3. Morgenthaler의 통계를 Kloppenbrog Verbin이 요약한 것 참조(Excavating Q) [본문으로]
  4. 도마복음, 64에서 공연 변이는 네 개의 다른 변명을 싣는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