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예수의 어록이 있었고,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가 그것을 참조했으며, 루카 복음서의 저자가 둘을 다 참조했을 수도 있다.
루카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마태오 10:32-33; 12:32; 10:19-20)
8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9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리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에 무슨 말로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일러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떨어져 있는 세 부분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8, 9, 11, 12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할 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파견 대상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11, 12는 마르코 복음서에도 있는 말씀인데, 마르코 복음서의 위치에는 없고 파견하는 부분에만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 왜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저 자리에 저 말씀이 있는가?
10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다는 논란에 대한 예수의 항변에 덧붙여진다. 그런데 이와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문장이 마르코 복음서에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10과 비슷한 문장이 둘 다 있다. 그런데 루카 복음서의 해당 부분에는 마르코 복음서에 있던 비슷한 문장도 없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6과 비슷한 형태의 문장이 마태오 복음서에 있지만 따져보면 의미가 다르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부모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크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루카 복음서에는 처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신까지 포함하여 미워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26, 27에 해당하는 구절이 마태오 복음서에는 부자·모녀·고부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미카서 인용 부분 말씀 부분에 있고, 루카 복음서에는 그 부분에 없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칼을 주러 왔다고 하지만 루카 복음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한다.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이 말씀이 루카 복음서에는 약은 청지기 이야기와 더불어 등장하는데, 마태 복음서에는 단편적인 어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Q문서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약은 청지기 이야기를 통해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재물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뒤이어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에 충실하라는 의미의 구절도 있어 흥미롭다.
※ 이 본문에서 인용한 역본은 공동번역 개정판입니다.
루카 복음서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마태오 10:32-33; 12:32; 10:19-20)
8 "잘 들어라.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다.
9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10 사람의 아들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한다.
11 너희는 회당이나 관리나 권력자들 앞에 끌려갈 때에 무슨 말로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마라.
12 성령께서 너희가 해야 할 말을 바로 그 자리에서 일러주실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떨어져 있는 세 부분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8, 9, 11, 12가 마태오 복음서에는 열두 제자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파견할 때 말씀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파견 대상은 마태오 복음서에만 나와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11, 12는 마르코 복음서에도 있는 말씀인데, 마르코 복음서의 위치에는 없고 파견하는 부분에만 이 말씀을 기록하였다. 왜 마태오의 복음서에는 저 자리에 저 말씀이 있는가?
10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린다는 논란에 대한 예수의 항변에 덧붙여진다. 그런데 이와 동일하진 않지만 비슷한 문장이 마르코 복음서에도 같은 맥락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에는 10과 비슷한 문장이 둘 다 있다. 그런데 루카 복음서의 해당 부분에는 마르코 복음서에 있던 비슷한 문장도 없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 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그리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6과 비슷한 형태의 문장이 마태오 복음서에 있지만 따져보면 의미가 다르다.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부모와 자녀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크지 않아야 한다는 건데, 루카 복음서에는 처와 형제 자매, 심지어 자신까지 포함하여 미워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26, 27에 해당하는 구절이 마태오 복음서에는 부자·모녀·고부 간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미카서 인용 부분 말씀 부분에 있고, 루카 복음서에는 그 부분에 없다.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칼을 주러 왔다고 하지만 루카 복음서는 불을 지르러 왔다고 한다.
13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이 말씀이 루카 복음서에는 약은 청지기 이야기와 더불어 등장하는데, 마태 복음서에는 단편적인 어록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Q문서의 존재 여부를 가늠하는 데에 도움이 되진 않는다. 약은 청지기 이야기를 통해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친구를 사귀는 데에 재물을 아까워하지 말라는 말이다. 뒤이어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에 충실하라는 의미의 구절도 있어 흥미롭다.
※ 이 본문에서 인용한 역본은 공동번역 개정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