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1837년 2월 5일 ~ 1899년12월 22일)은 미국의 침례교 평신도 설교자이다.
유니테리언(단일신론)교회의 도움으로 온 가족이 흩어지는 일은 없었지만,초등학교5학년 이상의 공부를 하지는 못했다. (유니테리언(Unitarianism)은 18세기 등장한, 이신론의 영향을 받은 종교이다. 이들은 신은 하나라는 유일신 신앙 즉, 단일신론(Unitheolism)을 주장하여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삼위일체 신앙을 갖고 있는 기독교와는 교리적으로 차이가 있다.)
17세 때인 1854년 시카고에 간 무디는 외삼촌 사무엘 홀튼(Samuel Holton)의 제화점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는데,5년만에 7,000달러를 모았을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1855년 주일학교 교사 킴볼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된 그는 시카고 빈민가의 어린이들에게 전도하는 어린이 사역을 하였다. 당시 그는 어린이들에게 구두팔듯이 화려한 언변으로 전도하여, 술집을 빌려 주일학교 공과수업을 할 정도로 어린이들이 매우 많이 모였으나, 정작 그리스도를 믿는 어린이들은 없었다. 비로소 무디는 자신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영업'한 것이지, 전도한 게 아님을 알게 된다.
1875년 시카고 빈민가에 교회를 설립했는데, 구두판매원출신다운 쉽고 설득력있는 무디의 설교와 감성을 자극하는 가수 아이라 생키(1870년 무디의 전도사업에 참여)의 성가는 많은 이들이 신앙을 갖게 했다.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에서도 전도했는데, 자리가 모자를 정도로 그의 설교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남북전쟁때는 전쟁터에서도 설교했는데 많은 군인들이 무디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다고 한다. 이러한 설교자로서의 활약상은 청년들이 해외선교 특히, 아시아와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게 했다. 무디성서학교(1886년)와 마운트 헤르몬 학교를 설립하는 업적도 남겼다.
언젠가는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마디도 믿지 마십시오. 그 순간 나는 지금 보다 더욱 생생하게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1837년에 육신으로 태어났지만 1855년 영으로 태어났습니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은 죽겠지만 영으로 태어난 것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1899년 뉴욕시 집회 때 한 설교)
인간의 감정호소
무디는 전도집회때마다 인간의 이성이 아닌, 감정에 호소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실제로 무디의 전도집회는 대형교회(Mega Church)들의 문제점들중 하나인 인간의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종교 이벤트의 원조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따라서 청중들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의 복음에 복종할 수 있는가를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자기 성찰없이,단지 분위기에 이끌린 일시적 그리스도인이 될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20세기의 대표적인 복음주의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령강림절 설교에서 전도집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역사상 위대한 부흥의 때에는 이른바 '일시적 신자들',말하자면 부흥의 기세에 눌려 교회에 발만 거치는 사람들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들도 괜찮은 신자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향력도 사라지고 자극도 없어지면 금방 모든 열성을 잃고 맙니다. 그런 것은 피상적 역사에 불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일정한 분위기가 유지되는 동안만 신자 행세를 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