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백과사전

전두환의 한나라당

한나라당의 역사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나라당
대한민국정당으로, 1997년 11월 21일, 당시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통합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당명은 한나라당으로 하여 창당하였다.
신한국당(新韓國黨)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존재했던 한국의 정당으로, 한나라당의 옛 이름이다. 1995년 12월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여 출범하였다. 
통합민주당 (1995)

1995년 12월,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은 민주당 세력이 개혁신당과 통합, 통합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약칭은 민주당. 1997년 신한국당과 합당하였다. 일부는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 1995년 12월 21일 등록.
  • 1996년 6월 13일 - 민주당으로 당명 변경
  • 1997년 11월 24일 - 신한국당과 함께 한나라당으로 신설합당하여 소멸.
  • 대표: 이기택/김원기/장을병 ⇒ 이기택(96.6.13) ⇒ 조순(97.9.18)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은 제5공화국 시기의 집권 여당이다. 약칭은 민정당(民正黨).

12·12 군사 반란을 통해 등장한 신군부를 중심으로 1980년 민주공화당을 축출하고, 1981년 1월 15일 창당하였다. 당시 대통령 전두환이 초대 총재가 되었다.


전두환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생과 가계

1931년 1월 18일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 내천리에서 완잔 전씨(完山全氏) 전상우(全相禹)[2]광산 김씨(光山金氏) 김점문(金點文)[3]의 10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몰락 양반 가계로 13대조인 전제임진 왜란 때 영산현감으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하였고, 이후 무관이 몇명 배출되었으나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몰락한 상태였다. 아버지 전상우는 가난한 농부였으나 마을 구장을 지낼 만큼 상당한 한문 지식이 있었다. 전상우는 의리가 강해 아들 전두환이 여덟 살이던 1939년에 동네 노름꾼 지인의 빚보증을 서주느라 문중의 종토(宗土)를 저당잡혔다. 이 종토를 돌려받는 과정에서 합천 읍내 주재소 순사부장의 소환을 받았으나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4]

유년기와 소년기

그가 5세 되던 해에 그의 가정은 경상남도 합천 율곡면에서 대구로 이사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호란보통소학교에 입학하였다.[3] 그의 아버지 전상우는 횡포를 부리는 일본인 순사를 벼랑에서 밀어 떨어트린 뒤 만주 지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3] 일본 순사의 수배를 피해 그의 부모가 이주한 곳은 만주 지린성 반석현에 숨어 살다가 1년 3개월 만에 다시 지린성을 떠나 귀국하게 되었다. 전상우는 그뒤 만주에서 배운 한의술로 한의원을 개업했으나, 정식으로 배운 한의학이 아니라서 손님들의 발길은 뜸했고,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이 일 때문에 전두환은 또래들보다 2~3년 늦게 호란보통소학교를 졸업했고 1947년 대구공업중학교에 입학해 5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통학하였다 한다.[3] 그 뒤 대구공업중학교를 졸업하고 대구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재학 당시 우수한 성적이었다 하며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저녁마다 목총을 들고 중학교 교사를 돌며 순찰을 했다 한다. 한국 전쟁 중 1951년 2월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전두환은 학창시절부터 생계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창시절 내내 전두환의 학업 성적은 우수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곤궁하였던 전두환은 대학교 진학의 꿈을 접고 대학에 준하는 ‘학비가 들지 않는’육군보병학교 갑종 장교 과정과 육군사관학교를 지망, 보병학교 갑종장교 과정에서 탈락하자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육군사관학교 시절

대구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그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사관학교에서 동기인 노태우·정호용 등과 만나 친분을 쌓고 인맥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훗날 이들과 군사 정변을 모의하게 된다. 생도시절의 전두환은 존경하는 인물로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을 꼽기도 했다. 육군사관학교 재학 중 우연히 육사 참모장인 육군 대령 이규동(李圭東)의 관사에 드나들다가 그의 딸 이순자를 만나게 되었고, 후에 이순자와 결혼하였다.

1955년 9월 전두환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과 동시에 육사 11기로 육군 소위에 임관하였다. 육군 소위 임관 후 육군부관학교(陸軍副官學校)에 입학, 1959년 1월 육군부관학교 군사영어반을 6기로 졸업한다.

군인 생활

1959년 2월 전두환은 미국으로 유학, 미국 육군특수전학교에 입교하였다. 그해 6월 미국 육군특수전학교 심리전 교육 과정을 마치고 미국 육군보병학교에 진학, 1960년 7월 미국 육군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후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에서 근무하다가 1961년 4월에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 직무대리에 발탁되었다. 1961년 5월 16일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육군 대위로 있던 그는 육사 내에서 학생장교들의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였다. 그 해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 비서관으로 선임되었다.

육군 소령 계급으로 있었던 1962년하나회를 조직하는데 가담하여, 군부 내에 인맥을 형성하는 한편 육군본부 특전감실 기획과장대리, 국가재건최고회의 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비서관 등을 지냈다.[6]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육군대학(陸軍大學)에 입교, 1965년 6월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그는 육사 동기들 중 육군 중령으로는 늦게 진급하였으나 1969년 육사 11기 동기들 중 최초로 육군 대령으로 진급하였고, 육군 본부 육군참모총장실 수석부관을 지냈다.[7]

월남 참전과 숙청 위기

1970년에는 육군 대령으로 연대장이 되어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귀국 후 장군으로 진급, 그 뒤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 1사단장을 지냈다. 장군 진급 후 육사 11기 출신과 그 후배 기수가 가입된 군장성 모임인 하나회를 결성하였는데 그의 동기 기수가 주축이 되었다. 하나회에서 윤필용 등과 함께 하나회를 이끌어갔으며 윤필용과 하나회의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기도 하였다.

하나회의 리더 중의 하나였던 그는 1973년 4월 윤필용이 사석에서 한 발언이 문제가 된 ‘윤필용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강창성에 의해 하나회가 군부 내 사조직으로 적발되어 위기에 몰렸으나, 예편(豫編)의 위기를 모면하고 1978년 제 1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제 1사단장으로 있을 때 부대 내 사기진작을 하겠다 하여 모범병사 10명을 선정하여 표창과 포상을 수여하였다.

1사단장 재직 당시 제3땅굴을 발견하기도 했으며, 1979년 3월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윤필용 사건으로 강창성에게 앙심을 품은 전두환은 강창성을 강제로 예편시키고 삼청교육대에 보내버렸다. 윤필용은 수감 중 강제 퇴역당하였고, 전두환은 하나회의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 전두환은 차지철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실세였다. 때문에 전두환과 차지철은 서로의 입지에 방해가 되는 상대방을 좋아할 리 없었으며 그래서 그 둘의 사이는 겉으로는 좋아보였지만 실제로는 원수지간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차지철쪽은 직설적이고 괄괄한 데에 비해 전두환쪽은 냉정, 침착하다는 점이 차이가 있었다. 훗날 박정희와 차지철이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한 이후에 전두환이 나서서 사건을 수사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뒷배경이 존재했기 때문이며 전두환은 이러한 뒷배경을 이용하여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전두환의 뒷배경이 대단하였으므로 박희도최세창은 대령 시절에 자신들을 준장으로 진급시켜 준 정병주를 배신하고 전두환의 편에 가담하게 된다.

  • 1980년 8월 6일 - 육군 대장으로 진급 후 8월 26일 부로 전역

10.26 사태 전후

이 부분의 본문은 10·26 사태입니다.

김재규

 10.26 사태가 있기 며칠 전 김재규는 로버트 브루스터 미국 CIA 한국지부장을 면담하였다. 이 일로 미국이 박정희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 김재규는 군사재판에서 사상 최악에 이른 한미관계의 개선을 자신의 거사의 한 이유로 들었지만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은 부정하였다.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은 김재규의 한미관계 발언을 '쓰레기 같은 소리'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2].

군사반란과 집권 과정

이 부분의 본문은 12·12 군사 정변, 5·17 군사 정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입니다.
미사일 포기각서 제출

미국으로부터 박정희 집권 당시 개발중이던 핵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요구받았다.

1980년 초 전두환은 악화된 대미관계를 풀기 위해 “사거리 180km, 탄두 무게 453kg 이상의 미사일은 절대 개발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써줬고 이후 레이건 대통령은 전두환 신군부를 승인하였다. 1990년대에 미국과 다시 협상을 벌인 결과 ‘미사일 각서’를 무효화하는 대신 2001년 MTCR(Missile Technology Control Regime)에 가입하여 ‘사거리 300km, 탄두 무게 500kg 이하’의 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13][14]

권력 장악

1980년 8월 6일 육군 대장(大將)으로 진급했다. 전두환은 곧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미국로스앤젤레스 타임스지의 공식 보도를 통해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5] 8월 25일 필리핀이멜다 여사 역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전두환 장군을 지지해야 한다고 공식 성명을 발표했다.[16]  10월 17일 비리정치인 정치활동 금지법 발표와 함께 구 정치정당을 해산하는 정당 해산령을 내려 제3공화국제4공화국의 여당이었던 민주공화당유신정우회, 민주당계 야당인 신민당,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 민주통일당 등을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이 형식적인 정치규제는 12대 대통령 선거를 1개월 앞두고 해지시켜 주었다. 구 정치인들은 각자 정당을 만들어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다.

핵개발 포기

전두환은 취임 초 핵실험 및 개발을 포기하였다. 1982년~1983년 플루토늄을 이용한 핵 개발 계획을 극비리에 추진하였고, 이는 일본미국 측 언론에 입수되어 보도되었다. 일본 아사히 신문의 보도로는 레이건 정부는 그런 정보를 입수해 계획 중지를 요구했으며, 전두환은 1983년 11월 한국을 공식 방문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핵개발 계획 중지를 약속하게 되었다.[22][23][24][25][26] 2004년 9월 8일 미국의 AP통신도 미국 고위관리의 증언을 인용하여 비슷한 보도를 하였다.[25][26] 핵개발을 계속 추진해나갔던 박정희 정권에 비교하여 1979년 12·12 군사 정변 이후 집권하여 정당성이 미비하고 집권기틀이 부족하였던 전두환은 미국의 지원과 정권의 정당성을 승인받으려고 핵개발 포기를 선택하게 되었다.[27][28] 또한 박정희 정권 말기에 악화하었던 미국과의 관계 회복과 레이건 미국 대통령 행정부의 박정희 집권 시절의 핵개발 계획에 매우 부정적이었던 측면도 작용하였다.[29] 또한 정통성 부재를 만회하기 위해 레이건 행정부의 지지를 받을 필요도 있었다.[29] 1980년 12월 19일 전두환은 박정희가 핵개발을 주도했던 원자력연구소를 한국핵연료개발공단과 갑자기 통폐합시킨 뒤 명칭에서 ‘원자력’이라는 말을 빼버리고 ‘에너지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변경시키기도 했다.[30] 전두환은 핵을 포기하였고.[25][26] 1983년 11월 당시 재처리 작업을 통해 추출했던 플루토늄은 국제 원자력 기구(IAEA)에 제출되었다.[23]

정치적 활동

1980년 9월 1일 부로 전두환은 연좌제를 폐지시켰다. 이는 전두환의 측근 인사들 중에 공산주의자 전력을 가진 부형이 있는 인사들 때문이었다 한다. 동시에 10월 유신 체제 이후 나타난 통행금지령을 해제하여 박정희 정권과의 차별성을 보이려고 했다. 

호헌과 6.10 항쟁

 전두환은 행정관과 외교관을 지낸 노신영을 후계자로 낙점하고 있었다. 제네바 대표부 대사로 있던 노신영을 1980년 외무부 장관으로 불러들였고, 1982년 안기부장, 1985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41] 그 뒤 강원용의 지적대로 정치수업을 시켜서 후계자로 낙점하려 하였으나[41], 전두환의 주변 인사들, 특히 군 출신들이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라며 반발하자 결국 전두환은 뜻을 거두고 말았다.[41] 이들은 전두환의 집권을 도운 신군부 계열로 이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새로운 쿠테타를 우려하게 되었다.

문민 정부 시절

1993년 김영삼문민정부 출범 후, 전직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수설이 유포되었다. 전두환은 산책을 하며 비자금 수수를 묻는 질문에 너털웃음과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1994년 총무처 장관과 서석재국회의원 박계동 등이 대통령 4천억 비자금 수뢰설을 주장하였으나, 전두환은 이 때에도 무대응으로 대응하다가 김영삼 정권의 내사로 비자금 수수가 밝혀지면서 1995년에는 12·12 사태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및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노태우와 함께 기소되었다.

이후 법정에서 전두환은 최종적으로 반란수괴죄가 적용되어 법정최고형인 사형 선고가 되었으나, 1997년 12월 22일 동서 지역화합 차원에서 사면되어 1998년 복권,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전·노 두 전직 대통령 법적심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국민의 정부 시절

8월 28일 개그맨 이주일의 빈소를 방문하였다.  

MB정부 시절 [편집]

 5월 10일 아나운서 윤현진의 결혼식에 참석하기도 했다.[68] 그는 또 “김 전 대통령 집권 당시 전직 대통령들이 가장 행복했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우회적으로 아쉬움을 표현했다.[73][74] 이때 그는 "김 전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10번 정도 청와대에 초대 받아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도움도 많이 받았다"며 "외국 방문 후에는 꼭 전직 부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방문 성과를 설명해주며 만찬 및 선물도 섭섭지 않게 해주셨다"고 말했다. 이어 "이명박 대통령이 그런 것을 잘 알아서 전직 대통령의 의견도 들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73] [75]

기타

2002년 2월 이주일의 빈소에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주일 씨가 아들이 사망한 뒤 박종환 감독과 함께 우리 집에 찾아와 함께 술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57]

평가

전두환에 대한 시각이 보수주의 내부에서도 전혀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한나라당,조선일보,동아일보를 비롯하여 대다수 보수 세력은 신군부의 집권 과정 중 일어난 12·12군사반란 , 5·17 쿠데타와 전두환 대통령 임기 동안 민주주의, 인권 탄압 조치를 내린 것에 대해서 만큼은 매우 비판적이다.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시 지지하는 데모를 하였으나 호응은 없었다. 이 때부터 정치적 두각을 나타냈으며 하나회 윤필용 필화사건으로 축출되었으나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보안사령관으로 복귀했다. 정승화도 전두환이 정치적 야망을 갖춘 인물이라고 평가하였고,[102] 전두환은 이후 대통령 박정희와의 잦은 교제를 통해 권모술수의 능력을 길러온 것으로 알려졌다.[103] 그의 붙임성에 대해서는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104] 그런가 하면 이희호는 “전 대통령의 유명한 숫기와 입담을 나중에야 알았다. 사형을 시키려 했던 ‘수괴’의 안사람을 상대로 동네 복덕방 아저씨가 아주머니 대하듯 일상적으로 대했다”고 밝히기도 했다.[105] 범죄소탕과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는 성과를 이룩했다는 일부의 견해도 존재하고 있다.

가족 관계 [편집]

그의 재임시절 형 전기환노량진 수산시장을 인수하고, 동생 전경환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을 지내며 이권을 챙기는 등 비리를 일으켜 퇴임 후 물의가 되었다. 사촌 전순환(全淳煥)은 기업인으로 골프장 허가를 미끼로 수뢰한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고, 사촌 전우환(全禹煥)은 고향에서 정미소 운영하다 일약 양곡가공협회장에 앉음. 새서울용역 감사. 각종 인허가 청탁 개입, 수뢰 혐의로 구속되었다.

부인 이순자의 사이에 재국, 재용, 재만 세 아들과 딸 효선을 두었다. 첫째 재국은 시공사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 누나 : 전학렬
    • 외조카 : 김영도(金永道, 기업인, (주) 대립개발 회장)
  • 차남 : 전재용(全在庸, 1964년 ~)
  • 사돈 : 김대중(金大中, 1924년 ~ 2009년 8월[142])
  • -----------------------------------------------------------------------------------------

    노신영

    노신영(盧信永,1930년 2월 28일 -)은 대한민국의 18대 국무총리, 12대 국가안전기획부장, 18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관료이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조력자로서 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노태우-장세동과 함께 제5공화국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사람으로 전두환이 한때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하기도 하였으나 군 출신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관련 인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노신영의 인연은 그가 주 뉴델리 총영사·주 인도대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차석으로 외무고시를 합격하였으나 연수원시절에 수석을 하여 해외공관을 선택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졌던 반기문은 당시 자신의 경제상황을 고려하여 물가가 비싼 미국행을 마다하고 뉴델리를 그의 첫근무지로 선택하였다. 이후로부터 반기문은 노신영이 국무총리를 지낼 때까지 그를 성심 성의껏 보필해주었으며, 노신영도 성실한 반기문을 크게 신임하였다. 특히 노신영이 국무총리시절때 반기문을 이사관(공무원 직급 2급)으로 파격승진한 일화는 유명하다. 노신영은 반기문의 정신적인 부분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반기문이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낼 시절, 2001년에 전국민이 안타까워한 김선일피살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탈레반과 협상을 담당한 외교통상부는 이 일에 책임을 져야했고 그 대상으로 당시 반기문 차관을 선택하였다. 이 일을 통해 반기문은 크게 낙심하였고 이 때에 노신영은 그의 멘토로서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박근혜

    생애 초기

    박근혜는 1952년 박정희육영수의 첫째 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이복언니 박재옥과 친동생 박근령(훗날 박서영으로 개명), 박지만이 있다.

    장충초등학교를 다녔고, 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가 어머니 육영수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대통령이었던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1975년부터 최태민의 권유로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였다.[2]

    이후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하였다.

    정치 입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었지만 정치 입문은 하지 않던 박근혜는 1998년에 한나라당의 후보로 대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 여성 정치인이라는 점 등으로 국회의원 후보 출마 때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출신 성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보수 진영 및 영남, 어머니인 육영수의 고향인 충청지역의 지지를 얻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200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염두에 두고 한나라당에서 탈당했으나 대선 전에 복귀했다.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5%까지 하락했다.[47]

    기타 

     2007년 8월에는 영화 화려한 휴가를 관람하고 5.18은 "민주화 운동"이라며 "27년 전 광주시민이 겪은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며 "그 눈물과 아픔을 제 마음에 깊이 새기겠다. 진정한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만들어 광주의 희생에 보답해야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49]

    2004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아버지 시절 여러가지 피해를 입으셨다"며 사과의 뜻을 전했다. [51]

    가족

  • 고모 박귀희 (은지원의 조모)
  • 내종질 은지원
  • 종형부 김종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