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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화

세계가 물리지 않는 소리

핸델의 '메시아'와 그에 얽힌 일화들
 
김삼

▲할렐루야 악보를 들고있는 핸델.     ©김삼
해마다 이맘때면 세계곳곳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 울려퍼지는 음악. 영 질리지도 물리지도 않는 소리랄까. 혹 여기서 질린다해도 영락없이 저기서 되울려주는 음향. '메시아'와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메시아'는 이제 강림절(대림절·대강절)과 성탄절, 수난주간과 부활절시즌의 담을 넘어 연중 수시로 연주된다. 경계와 한시가 없는 지구인의 음악이다.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저마다 '메시아'를 즐긴다. 알고 보면 신자도 아닌 사람들이 메시아 싱얼롱(sing along)에도 곧잘 모여든다.

에릭 브리지스가 인용한 일화다. 중국대륙을 벗어나 본 일이 없는 여성이 난생처음 서구나들이를 했다가 메시아연주회에 참석했다. 장엄한 승리의 끝 메아리가 사라지고 박수소리가 잦아들자 떨림과 초조,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의 그녀가 주위사람들에게 모자란 영어로나마 물었다. "그들이 노래한 그분이 도대체 누군가요?" 

희한하지 않은가. 미처 모시지도 않은 메시아를 사람들이 즐기다니. 속에 받아들이면 더 좋으련만. 예수님을 거부하는 유대인중에도 '메시아'라면 줄줄 외우고 다니는 이들이 있다.

필자의 대학원시절 유대인인 지휘법교수는 '할렐루야'코러스를 합창파트는 물론 반주까지 4부로 거의 완벽하게 암기하고있었다. 알다시피 '할렐루야' 가사는 요한계시록 본문이다. 물론 전공과 직업상 그랬겠지만.
그와 친구교수, 둘에게 전도를 시도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생각할수록 묘하고 기가 찰 노릇이다. 참 메시아를 거부하면서도 '메시아'를 듣고 부르고, 부르면서도 거부하다니.

핸델은 시쳇말로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였다. 이전의 누구도 생각지 못했고 기회를 갖지 못한 성구묶음을 사업가인 제넨스를 통해 입수해 이 곡을 쓰는 행운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 없는 인생이나 '메시아'를 뺀 핸델은 시체와 다름없다.

그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한 메시아를 단지 재능 때문에 찬양하게끔 하나님이 점찍어놓은 사람이다. 수천년 기독교역사, 아니 만년 가까운 세계역사 속 18세기 그 시점에서 메시아를 썼기 때문이다. 

▲베토벤이 베낀 메시아 악보의 일부.     ©김삼

몇몇 위대한 음악인들이 '메시아'에 개입됐다. 모차르트는 핸델 사후 50년이 지난 뒤 이미 연주방식이 달라진 당대를 위해 '메시아'를 상당량 편곡했다. 특히 관악의 강화를 시도했다. 지금도 이 편곡으로 종종 연주된다.

괴테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매너가 뻣뻣했던 악성(樂聖) 베토벤도 '메시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메시아' 25번 곡 "그분이 채찍 맞아"를 갖고 푸가기법을 연구한 그는 1824년 "핸델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다. 그의 무덤 앞에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을 테다."라고 고백했다.

베토벤이 핸델의 메시아 중 일부를 직접 베껴보면서 다양한 작곡기법을 배운 악보들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그의 음악 곳곳에 핸델의 영향이 배어있을 정도로 '메시아'가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베토벤은 임종을 얼마 앞둔 때도 침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혹 나를 도와줄 의사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이름은 '기묘자'라 불릴 것이다." '메시아' 12번 곡의 이사야 9:6 일부를 인용한 셈이다. 

핸델은 바흐와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양자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철학적 심연을 지닌 바흐음악이 보다 깊은 음미 속에 젖어든다면, '메시아'는 처음부터 압도하는 대중성과 감격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바흐의 '마태수난곡'과 수많은 칸타타가 메시아를 능가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후자의 극적인 대중성과 메시지 때문이다. 성경을 드라마화 한 핸델의 오페라적 역량이 주효했다.

바흐의 교회음악은 교회당 안에서 어울린다. 그러나 핸델은 콘서트홀이나 예배당 안에 '메시아'의 복음메시지가 갇혀있길 원치 않았다. 한 귀족이 '메시아'로 대중을 즐겁게(entertaining) 해온 것을 치하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각하, 제가 단지 그들을 즐겁게만 했다면 유감스럽습니다. 저는 그들이 변화되길 바랐습니다."

▲어린 시절의 핸델.     ©김삼

흔히 가사보다 음악에 치중하는 이들은 메시아도 바로크음악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물린다고들 하나, 드라마틱하게 엮인 성경메시지의 내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다.
100% 성경본문인 메시아의 가사들은 신구약의 흐름을 한데 꿰뚫은 듯 요약한 복음의 진수다. 이처럼 거의 완벽하게 구속사적으로 본문을 파일링 해놓은 음악은 역사상 없었다. 더욱이 당대에 폭넓게 보급돼 있던 제임스왕역의 본문이다. 그것이 메시아의 파워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탕자의 비유에 빗대볼 때, 바흐는 맏아들, 핸델은 둘째아들과 비슷하다고. 전자는 집안이 온통 음악가문인 데다 주로 교회에 본거지를 두고 꾸준히 교회음악으로 하나님을 높이며 살아갔다. 물론 세속음악도 썼지만.

후자는 교회를 발판으로 음악을 익혀 세상으로 나갔다. 교회 속에서 일할 기회도 있었지만 거리를 두면서 세상 물을 더 많이 먹었다. 핸델은 1685년 2월23일 독일 작센 할레 온잘에서 음악과 무관한 집안에 태어났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시종으로 외과의사/이발사였던 아버지는 그를 법관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소년의 음악재능을 아깝게 생각한 바이센펠스 공작의 권고에 승복한다. 

그래서 리브프라우엔키르헤 오르간주자 자카우에게 음악이론과 기악을 배우고 17살 나이로 칼비니스트 대성당의 오르간이스트로 임명되지만 이듬해 독일오페라의 중심지 함부르크로 향한다. 오페라 오케스트라에서 잠시 연주하다 이내 악장이 됐고 19살 때 첫 오페라 '알미라'를 작곡했다. 특히 이탈리아와 로마체류 중 이탈리아 악풍을 섭렵하다시피 했다.

1712년 잉글랜드 방문 후 2년만에 귀화했고 앤 여왕에게 왕실장려금을 받아 웨일즈공 일가 채플 지휘자 겸 1720년 설립된 왕립음악학회의 디렉터가 된다. 곧 이어 오페라 만들기에 탐닉했다. 그러나 때가 좋지 않았다.

당시 청중의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카드게임, 실내 누비기, 호두까기, 침 뱉기, 싫어하는 가수에게 야유하기 등을 일삼았다. 필립 옌시의 말대로 거구에다 '폭발성 에고'를 지닌 핸델로서 참기어려운 꼴불견이었지만 40여편의 이탈리아식 오페라로 약25년간 매료시켰다.

▲할레의 핸델 생가.     ©김삼

그러나 이탈리아 오페라에 식상한 시민들이 핸델의 노랫가락까지 빌린 존 게이의 '거지오페라'로 쏠리면서 이탈리아오페라는 사양길에 접어든다. 관객들이 점점 줄어들자 염려하는 친구들에게 핸델은 "빈 장소는 음향이 더 좋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1737년 급기야 핸델의 오페라캄퍼니가 파산해버렸고 만회를 위해선 모종의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다. 엎친 데 덮친단 격으로 후원자인 앤 여왕이 죽었다. 충격 때문인지 핸델은 발작성 질환으로 왼쪽허리 마비증상을 일으켰다. 병 때문에 더욱 기독교적 주제에 눈길을 돌리게 됐다고 일부 사가들은 내짚는다.

적수와 결투도 여러 번 치렀다. 일설에 의하면, 마지막 칼싸움에선 상대의 칼끝이 핸델의 옷 단추에 걸리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을 정도다. 경제적으로나 명예 상으로나 말씀이 아니었다. 

▲메시아 성구묶음을 제공한 문학가 찰스 제넨스.     ©김삼

영국인들은 그런 그를 '독일 멍텅구리'라고 불러댔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 요인들이 나중 되레 그를 살리는 '메시아' 저작의 결정적 동기가 됐다.

그즈음 셰익스피어 희곡편집 취미를 가진 유복하고 괴벽스런 문학가 제넨스를 만나 당시로서는 새로운 부문인 영어성서 오라토리오 장르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제넨스는 옥스퍼드 출신이었으나 하노버왕가를 합법왕실로 여기지 않은 선서거부자(non-juror)여서 학위를 따지 못했고 공적인 인정도 받지 못했지만 핸델이 많은 도움을 받았고 상당기간 친구로 지냈다. 

둘의 첫 작품으로 '에스테르'(1739년)가 선보일 때 대성당 성가대원이 동원되자 극장과 핸델 음악을 혐오해온 교회는 발끈했으나 왕가에서는 참석했다. '사울', '벨샤자르', '데보라', '솔로몬', '에집트의 이스라엘', '예프타', '삼손'등 20여편의 명작들이 그즈음 만들어졌다. 초연은 으레 핸델 자신이 오르간 독주를 맡아했다. 

런던주교 등 교권주의자들은 거룩한 성경가사가 들어간 음악이 어떻게 감히 세속 극장에서 연주될 수 있느냐고 펄펄 뛰며 맹비난을 가했으나 시민들은 참신한 새 종류인 이 오라토리오를 들으러 솔솔 몰려들었다.

하지만 오라토리오도 넉넉한 돈을 안겨주진 못해 절벽에 선 기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교도인 제넨스가 공동기도서에 수록된 순서대로 정리한 성경본문 묶음을 가져왔고 이것이 핸델의 마음을 움직였다. 곡의 완성엔 한 1년쯤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때 홀연히 잉글랜드가 아닌 아일랜드에서 142명의 채무수감자 석방을 위한 자선음악회에 작곡연주 청탁을 받아 흔쾌히 응한다. 자신도 그즈음 채무수감 위협을 받는 신세인지라 이심전심의 이벤트였다. 그래서 1741년 8월22일부터 9월14일까지 24일만에 총260쪽 전곡을 완성했다. 침식을 거의 잊고서였다. 

▲1741년 메시아 작곡 당시 핸델의 초상화(56세).     ©김삼

'할렐루야'는 9월6일 탈고했으니 웅장한 대합창곡 '죽임 당하신 어린양'과 '아멘' 등 3부 부활/영생 편의 9곡을 8일만에 완성한 것이며 1부 예언/탄생, 2부 수난/속죄도 평균8일씩 걸린 셈이다(제넨스가 본문가사를 3부로 나눈 것은 1743년 런던연주를 앞두고서였다. 오라토리오는 모두 3부작이다).

모든 작품을 단기 완성하는 체질인 그가 '메시아'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곡을 쓸 동안 내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모른다. 하나님만이 아신다…" 사도 파울의 고백과도 비슷하다. 

'메시아' 악보는 유달리 지저분하고 고친 자리가 많아 많은 눈물과 생각을 거치지 않았나 추측된다. 사환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 날 방에 들어갔더니 핸델이 '할렐루야' 부분을 앞에 놓고 눈물범벅이 돼 있었다.
이때 한 것으로 알려진 말은 유명하다. "나는 내 눈으로 온 하늘과 위대하신 하나님당신을 뵈었다고 생각한다." 메시아를 통해 그의 영이 다시 태어났음이 틀림없다.

메시아작곡에 관해 로버트 맨슨 마이어스는 "음악사상 처음으로 웅대한 인간구속 드라마가 한 서시시로 다뤄졌다"고, 음악역사가 R.A. 스트릿필드는 "인간구속사의 강력 드라마를 미적 눈길로 본 사상 첫 시도였다"고 논평했다. 

이윽고 1742년 4월13일. 오라토리오작품으로서는 유일하게 국외 초연된 더블린 연주회는 사순절기간이었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초연을 앞두고 거기서도 교권주의자들이 극장에서 한다는 이유로 훼방을 놓았다. 아일랜드 출신 성직자이자 '걸리버 여행기'를 쓴 유명한 풍자문학가 조나단 스위프트가 성패트릭 성당 성가대원의 참가를 말리는 등 해지하려 든 것이다. 

▲런던 코벤트가든에서의 메시아연주회 프로그램 표지.     ©김삼

하지만 자선음악회였기에 반론이 거둬졌고 당초 제한인원 600명을 초과한 약700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다. 4월9일 공개리허설 때도 자리를 메웠다. "숙녀분들은 부푼 스커트를 입지 마시고 신사분들은 검을 집에 놔두고 오세요."라고 선전한 결과였다. 

수익금은 채무자들의 빚을 갚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했다. 메시아는 역사상 어떤 음악보다 더 주린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고 고아를 돌봐준 음악이었다.

초연 때의 일화중 한가지는, 당시 알토독창자로 출연한 수재너 마리아 치버 부인은 토마스 안(Arne) 박사의 누이동생이었다. 남편의 간계로 채권자 윌리엄 슬로퍼와 동침한 뒤 남편에게 납치와 고소를 당했다가 채권자의 정부가 되어 딸을 낳아주곤 과거를 청산하기 위해 더블린으로 와 메시아 연주에 동참한 것이다. 그녀의 '그분은 멸시를 받아' 독창을 듣고 감격한 패트릭 딜래니 목사는 벌떡 일어나 "여자여, 이걸로 그대의 모든 죄가 사해져라!"고 외쳤다. 딜래니는 핸델의 오랜 후원자이자 벗인 메리 펜다브스 여인의 남편이었다.

이듬해 런던에서 메시아가 아닌 '성스러운 오라토리오'란 주제로 가진 연주회는 다소 서늘한 반응을 보였다. 다만 '할렐루야' 서곡부분에서 조지2세가 기립하자 청중도 기립함으로써 이후 계속 전통으로 이어진다.

베토벤처럼 핸델도 평소 성미가 불같았다. 한 베이스 독창자가 악보를 보고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자 열기가 뻗친 나머지 4개 외국어로 골고루 욕설을 퍼부은 다음 투박한 독일식 영어로 내뱉었다.
"야, 이 건달아! 자네 입으로 독보할 수 있다고 했잖아, 엉?"

그러나 평생 신실한 루터교인이었고 성경에도 박식한 편이었다. 1751년부터 핸델은 시력이 약화되기 시작해 거의 완전히 잃게 되지만 죽기까지 작곡은 계속한다. 

▲핸델이 살던 런던 집의 침실.     ©김삼

1759년 4월6일. 병들고 눈먼 74살의 그가 가장 아끼던 자선기관인 고아들을 위한 펀들링병원(현 토마스 코람 재단)을 위해 그로서는 마지막인 서른 번째의 메시아 연주를 끝낸 뒤 우레 같은 갈채가 터져나오자 겸손히 고백했다. "제가 아니라…하늘로부터 모든 게 옵니다."

메시아는 본래 수난-부활절 기간 연주용으로 작곡된 것이었다. 핸델의 소원은 "나의 정다우신 주님, 구세주이신 좋으신 하나님과, 그분의 부활절에 재결합할 소망으로 성금요일에 죽고싶다"는 것이었는데 11일에 유언장을 쓰고 부활절전날(4월14일) 아침에 숨졌다. 소원대로 몸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묻혔다.

핸델의 대중사랑은 숨지는 순간까지 이어졌다. 메시아로 변화 받은 이래 약자와 빈민들을 사랑했다. 메시아연주회 대부분은 자선음악회로 치러졌다. 핸델 생시에 메시아가 교회서 연주된 적은 한번밖에 없었다.

한편 메시아는 지난 230여년간 모차르트 편곡 등 수많은 편곡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핸델 자신이 다양한 연주상황과 조건에 맞춰 그때그때 고쳐 쓰기도 해 이렇다할 정석 없이 지휘자들이 입맛 따라 골라 연주한다. 

▲19세기말부터 1930년대까지 메시아 초기연주를 모은 역사적인 음반.     ©김삼

첫 원본의 합창파트는 소프라노를 소년들이 알토를 남성알토(또는 카운터테너)를 부르는 식의 남성합창으로 불려지게 돼 있었다.

참고로, 기존의 '헨델'보다는 '핸델'이란 표기가 원음에 더 가깝다. [애+에] 음절이다.



기사입력: 2003/12/10 [18:45]  최종편집: ⓒ 뉴스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