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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영어

영화로 배우는 영어 뒤집어지는 영어

안정효 글 · 그림

 

'은어' 라는 우리말 단어 하나에 해당되는 표현만 해도 상황과 경우에 따라 저마다 달라진다. 이런 단어들은 저마다 비슷하면서도 미세하고 치명적인 차이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일이 따로 익혀야 하며 따라서 쉽게 영어를 배우겠다는 야무진 욕심을 버리고 차근차근 공부하겠다는 각오가 필요하다. 영어를 쉽게 가르쳐 준다는 상업적인 학원의 광고문은 믿지 말기 바란다.

대학 시절에 필자가 영어로 장편소설 일곱 권을 썻다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야말로 안정효가 천부적인 언어적 감각을 처음부터 타고났거나 기막힌 비결을 찾아내기라도 한 줄 잘못 판단다고, 영어공부를 어릴적에 어떻게 했느냐고 요령을 물어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책에서도 고백한 바와 같이,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here라는 부사의 뜻조차 무엇인지를 몰라 외삼촌에게 벌을 받았던 인물이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 영문과에 입학했으면서도 영어와 문학을 너무 모른다는 자채감에 수많은 고전을 닥치는대로 읽고 무작정 영어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때부터 수많은 단어를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일일이 사전을 뒤져 가장 정확한 말 하나를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해왔고, 그러다 보니 참된 영어공부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사람들은 요령을 가르쳐 달라면서 실제로 방법을 제시하면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실천하지 못한다. 공식과 요령만 외우고 실질적인 공부는 하지 않으면서 실력이 붙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욕심이다. 우리말도 그렇지만, 모든 언어는 평생 공부해야하는 학습이어서, 몇 가지 공식만 건성 암기하고 쉽게 끝내서는 안 된다.


발록구니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 언어는 이렇게 평생 공부해도 끝이 없다. 하물며 외국어를 몇 달만에 master하겠다는 생각이라면…



아기가 태어나서 말을 배우듯이 학습자가 스스로 선별하여 습득해야 동물적으로 자연스럽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말을 가르칠 때는 단어의 품사나 문장구성법을 가르치지는 않는다. 엄마가 아예 아기를 체계적으로 교육하지를 않는다. 언어 습득의 주체는 아기이고, 엄마는 기껏해야 정보를 보충해주는 보조적인 역할밖에 하지를 않는다.
 모든 분야에서의 공부는 학생이 스스로 하며, 스승은 지식을 보여주기만 할 뿐, 머릿속에 넣어주지는 않는다. 언어 학습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잘못된 교육을 받은 아이는 부모와 선생과 학원의 강사가 공부를 대신 해주기를 기대하고,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남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를 기다렸다가 밑줄만 긋는다.
 필자는 중학교에서 영어 문장의 다섯 가지 형식을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난다. "S(주어)+V(동사)+…" 어쩌고 해가면서 영어선생이 칠판에 또박또박 써놓았던 하얀 글씨도 기억난다. 그러나 솔직히 얘기해서 나는 문장의 5형식이 무엇인지 지금은 기억조차 못한다. 그래도 나는 영어로 소설을 쓰거나, 남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답시고 이런 책을 집필하는데 조금도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결국 5형식의 식별법은 배워봤자 실생활에서는 써먹지도 못하는 정보였다.


 아기는 엄마가 문법 설명과 더불어 선별적으로 가르쳐 주는 체계적인 어휘의 집합 속에서가 아니라, 어른들이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무수한 단어들의 혼돈 속에서 듣기를 시작하고, 거기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단어들을 가려내어 스스로 습득하여 조금씩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단계로 옮겨간다.
 언어는 실생활에서 먼저 존재하고, 공식화한 문법은 나중에야 체계화의 과정을 거친다.

심심풀이 삼아서, 종이사전을 손에 들고, em-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라. 그러면 embed바닥에묻어두다처럼, 이미 내가 아는 단어(bed, 바닥)에 em-놓다, 두다이 머리에 붙어 어떤 새로운 뜻이 되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단어까지도 한꺼번에 무더기로 익히는 학습 방법이다. 그리고 이런 발견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아예 영어공부를 집어치우고 다른 계획을 세우는 편이 인생설계에 훨씬 현실적인 도움이 될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