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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사회

[Why] 한글과컴퓨터, 그 뒷모습은

정성진 기자 sjchung@chosun.com

입력 : 2010.07.10 03:04 / 수정 : 2010.07.10 13:28

'국민 SW'에 의지해 흑자 내지만…8번 주인 바뀌고 또 팔려갈 운명

M&A(기업인수합병) 기대감이 높아진 한글과컴퓨터가 상한가(5390원)를 쳤다. M&A 가능성에 주목을 받은 데다 삼성전자의 갤럭시S에 한글과컴퓨터 제품이 장착될 것이란 소식까지 겹치면서 8일 장 초부터 마감까지 내내 상승했다. 본지 6월9일


한글과컴퓨터는 국민 소프트웨어기업으로 통한다. 외제 일색인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한글'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토종 기업이다. 19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의 '완성형 문자'와 한글과컴퓨터의 '조합형 문자' 논쟁이 붙었을 때, 국민들은 애국심 수준에서 맹렬하게 한글과컴퓨터를 지지했을 정도다. 덕분에 창업주 이찬진씨는 국회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그런데 속을 열어보면 바깥에서 알고 있는 '토종 벤처기업'이라는 건강한 이미지와 상당히 다른 얼굴이 보인다.

이 회사의 주가는 기업 실적보다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결정돼왔다. 왜 그럴까. 정상적인 주인을 만나본 적도 별로 없고, 그나마 주인조차 몇년 못 가서 계속 바뀌었기 때문이다. 2000년 이후 한글과컴퓨터는 주인이 7번 바뀌었다.

1998년 국민은행 직원이 한글 8·15 버전을 진열해놓고 있다. 당시 국내에는 한글과컴퓨터 살리기 운동이 범국민적으로 벌어졌다. /조선일보 DB

이 회사는 1990년 현재 드림위즈 대표인 이찬진씨가 만들었다. 이찬진 대표는 약 10년 동안 회사를 경영하다가 IMF 외환위기 이후 회사를 팔았다. 이후 계속 주인이 바뀌다가 8번째 주인인 현재 최대주주 ㈜셀런에이치도 지난 5월 회사를 팔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9번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주인이 자주 바뀌었으니 경영이 잘 될 턱이 없다.

업계에서는 "한글과컴퓨터 주인들은 상품 개발로 경쟁력을 키우기보다는 비싼 값에 회사를 팔아치워 돈을 벌 궁리만 했다"고 비난한다. 게다가 ㈜셀런에이치가 임명한 이사들은 회사에 385억원의 손해를 끼쳤다는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다. 한글과컴퓨터는 한때 상장 폐지 대상에 올랐다가 가까스로 리스트에서 빠지기도 했다.

그런데도 한글과컴퓨터는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다. 프로그램 '한글'을 비롯한 한글과컴퓨터의 제품은 국내시장에서 약 18% 정도의 시장점유율을 갖고 있다. 나머지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장악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비교도 안 되지만, 점유율이 몇 년째 떨어지지는 않고 있다. 정부 기관이 대부분 한글과컴퓨터의 소프트웨어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힘이다. 덕분에 2003년부터 2009년까지 7년 연속 순이익을 기록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세계 시장을 개척한다든지, 업무용 소프트웨어를 떠나 새로운 신규 비즈니스에 진출해 성공한 것은 없다. 창의적인 신제품을 개발했다는 소식도 들린 지 오래다. 최근 스마트폰 시장에 맞는 제품을 내기도 했지만 '대박' 수준은 아니다.

업계에서는 한글과컴퓨터가 그동안 정상적인 주인을 만나지 못한 것이 회사 탓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키움증권 장영수 애널리스트는 "한글과컴퓨터의 정체는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의 거울"이라고 말했다.

장 애널리스트는 "소프트웨어 산업의 중요성은 모두 다 인정하고 있지만 국가의 지원은 효과적이지 못하다"며 "게다가 시장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불법 복제해서 쓰는 상황이다 보니, 극단적으로 말하면 기업에 신제품 개발 동기를 부여할 시장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 한글과컴퓨터 주인들이 신제품 개발보다는 기업 매각으로 이윤을 창출하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 가운데 매출이 가장 많은 티맥스소프트가 최근 워크아웃(기업재무개선작업)에 들어간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