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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교회

요세푸스, 예수

초기 비기독교 문서들은 역사적 예수의 실재에 관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성경 및 고대 기독교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1-2세기 기독교 밖의 자료는 역사적 예수가 실재했다는 것을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다. 이 자료들은 예수가 죽으신지 수십 년이 지난 주후 60년경에 쓰여진 것이다. 이 자료들은 유대교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쓴 역사기록인 『유대 고대사』, 유대교 법전인 『탈무드』, 트라얀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인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 타키투스가 쓴 역사 기록인 『연대기』, 수에토니우스의 문서 등이다. 이 문서들은 역사적 예수에 관하여 사실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들 문서들은 종교적인 문서가 아니라 일반 세속적인 문서들이다. 이러한 초기 문서들은 우리의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이 그 시대에 일어난 사실에 관하여 보도하고 있다.

1세기 유대교 문서들의 증언

60년경에 집필이 시작되어 93년에 완성된 대저작『유대 고대사』(Jewish Antiquities)에서 귀족 바리새파에 속한 유대교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나사렛 예수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그는 주후 62년에 투석형으로 죽임을 당한 야고보를 언급하면서 그가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의 동생”이라고 말하고 있다. 요세푸스는 여기서 예수가 이미 그의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전제하고 있다(Ant. 20:200).

요세푸스의 대저작의 제18권에는 유명한 ‘플로비우스의 증언’(18:63-64)이 있는데 이 증언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가장 충격적이고 의미있는 증언이다. 그는 다음같이 증언한다: “이 때 예수가 살았는데, 참으로 그를 사람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는 현인(賢人)이었다. 그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었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많은 희랍인들을 추종자로 얻었다. 그는 메시아였다…”(Ant.18:63). 이것은 요세푸스 자신이 제시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증언이다. 요세푸스는 예수를 “지혜로운 교사,” “기적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예수가 자신을 메시아라고 주장함으로써 유대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사형 선고받아 당시의 극형의 상징인 “십자가에 달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유대교 법전인 탈무드(Talmud)도 예수에 관하여 매우 드물게나마 언급하고 있다. 탈무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예수를 “사생자, 기적을 일으키는 자, 요술쟁이, 거짓교사”로 비난하고 있으며, 유월절 전야에 나무에 달렸다고 언급하고 있다.

2세기 그리스 로마 문서들의 증언

주후 112년에 쓰여진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Letter from Bithynia)에서 당시 비투니아 총독 젊은 총독 플리니우스(Plinius, AD 61-113)는 트라얀 황제(Kaiser Trajan)에게 기독교인들의 실태를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편지에서 로마 황제의 상에 존경을 표하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물으며, 기독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마치 신인 것처럼 그에게 바치는 찬송시를 흔히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는 이들의 오류와 잘못이란 동터기 전에 모이는 고정된 날에 대한 관습과 그리스도에 대한 단어의 형식을 신(神)으로 교대로 외우는 관습이었습니다. 이들은 맹세에 구속되어 있었으며 도둑질이나 강도짓이나 강간에 연루되지 않았고, 그들의 말을 깨뜨리지 않았고, 요청될 때 증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습은 이것을 행하고 난 후 헤어지고 다시 모였는데 그것은 일상적인 해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Epistles 10:96).

여기서 플리니우스는 예수가 세상에 살았고 초대교회 신자들에 의하여 신성(하나님의 아들, 인자 등)으로 불렸던 인물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비투니아에서 온 편지”이라고 불리는 플리니우스의 서신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나사렛 예수에 관한 가장 오랜 자료이다. 이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1세기의 기독교인들이 믿었고 생활했던 것을 비기독교적 원천에서 알 수 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 AD 55-120)는 『연대기』(Annals)에서 “크레스챤들”(Chrestianer), 곧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이 종파의 창설자 그리스도에게 소급시키고 있다. 그는 예수가 로마 황제 디베리우스(Diberius)치하에서 유대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의하여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고 말한다(Annals, 15:44, 2-5).

『연대기』보다 5년 후, 다른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Suetonius, AD 69-140)는 그의 문서에서 클라디우스 황제(Kaiser Claudius, AD 41-54)가 “크레스투스(Chrestus)의 선동”에 의하여 지속적인 소란을 일으킨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했다고 말한다(Life of Claudius, 25:4). 여기서 “크레스투스”는 그리스도를 가르키고 있다. 그는 예수를 기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반체제적 유대인들 모임의 지도자로 묘사하고 있다. 수에토니우스의 문서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대립에 의하여 일어난 소요에 관하여 보고하고 있으나 이 소요의 사실적 진상에 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상의 초기 비기독교 문서들에 대한 고찰에서 우리는 다음같은 사실을 확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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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룸 : 가필인가?

요세푸스의 경우 부분적 가필이란 결론을 내렸던 기독교학자들도 타키투스의 저작에 대해서는 가필의 가능성을 매우 적게 보고 있다.

우선, 빌라도를 행정관으로 묘사하고 있어 신약성경과 배치된다. 기독교인들이 적었다면 신약성경과 일치하는 내용인 총독이라 적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기독교를 인류를 증오하는 ‘부패한 미신’집단으로 보며 그리스도를 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이고 있는 이 기록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기록되었을 리 만무하다. 의도적인 가필이라면 그 목적이 있었을 것이나 이 기록으로 기독교인들에게 득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는 반면 흠집만 더해지는 꼴이니 의도적 가필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란 사람이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박혔고, 그 그리스도란 인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종교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로마의 대화재 이후 박해받은 종교인은 오직 기독교인들 뿐이었으므로 이 글의 그리스도가 ‘예수’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 없다.
참고도서 : 역사적예수(게르트 타이쎈 외), 예수는 역사다(리스트로벨)

(이자료에 대한 회의론자들의 주장)
먼저 문건의 작성연대가 예수 이후 80년 이상 지난 이후로서, 타키투스는 직접 아는 내용을 기술한 것이 아니고 소문이나 다른 누군가로부터 들은 정보를 말하고 있다. 게다가 ‘연대기’의 단 하나 남아 있는 현존사본은 A.D.850년 경에 제작된 것으로 원본이 만들어진 후 무려 700년 이상 지난 것이어서 요세푸스의 경우처럼 후대의 기독교인들이 가필하였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당초에 타키투스가 기록하였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이 문건에서 예수라는 이름은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고 그냥 그리스도라고만 표현되어 있을 뿐이어서 예수에 대한 역사적 증거가 될수없다
(이주장에 대한 반박)
현존사본이 A.D.850년에 제작되었다는 것이 내용의 신뢰성을 해치는가?
물론 오래된 사본일수록 원본과 차이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있는 연대기의 사본은 굉장히 정확한 로마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것은 당초에 적혔을 원본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사본으로 필사되는 과정에서 변할 수 있는 요소들은 입장과 해석의 차이일 뿐이지 사건 자체가 통째로 더해지거나 빠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만약 회의론자들의 주장대로 사본의 제작연대가 원본과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예수의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이야기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로마사의 대부분에 물음표를 던져야 할 것이다. 사실 역사학에 있어서 이러한 주장은 모든 기록물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연구의진행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채 막막무가내로 생떼를 쓰는 것과 같다.

출처 : 종교신문 1위 크리스천 투데이 Christian 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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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생애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자료는 4복음서가 거의 유일한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런데 예수보다 약간 후대의 사람이지만, 예수와 동시대의 역사가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AD 37~c.100)의 『유대인 고대사』(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 예수에 관한 언급이 있다. 이 언급이 참으로 역사적 예수의 진면목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는 신약성서 밖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요세푸스는 예수가 처형당한 직후에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10대의 청년 시기에는 엣세네파에 속하여 사막에서 고행생활을 하기도 했다. 또 바리새파의 일원으로 자신을 분류할 만큼 율법주의에 철저한 훈련을 받은 고등한 태생의 지식인이기도 했다.

요세푸스는 물론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유대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그는 떳떳지 못한 변절자의 입장에서 로마인들을 위해 유대의 역사를 집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역사를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가에게 과도한 이념성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유대인을 비방하는 세력에 맞서 유대인의 영웅적 행동을 충분히 옹호할 수 있었다. 하여튼 그의 역사기록은 우리가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보충자료로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예수에 관한 기록은 본디오 빌라도가 총독으로 재임하고 있던 시절에 벌어진 사건들을 기술하는 도중에서 매우 퉁명스럽게 한 독립된 단락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때에,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현자(a wise man)라고 말해야 할 예수가 있었다. 그는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고, 진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들의 스승이었고, 수많은 헬라인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대인들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은 자)였다. 빌라도가 우리 가운데서 지도자 역할을 하는 고귀한 사람들의 고소 때문에 이 사람을 십자가형에 처했을 때, 처음부터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결코 그에 대한 사랑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의 이름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들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다.(『유대인 고대사』, Bk.16, Ch.3, 63~64)

우리가 성경 밖에서 역사적 예수에 관한 이러한 당대의 증언을 확보한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문헌의 신빙성에는 많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편집적으로 볼 때, 예수에 관한 단락을 빼놓고 보면 『유대인 고대사』의 문장은 더 부드럽게 연결된다. 사건들의 시간상 흐름이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요세푸스의 저술들은 유대인들에 의하여 편집된 것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에 의하여 보존되고 필사되었다.

요세푸스의 이 증언을 처음으로 언급한 사람은 4세기 초에 그 유명한 『교회사』(Ecclesiastical History)를 쓴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c.260~c.339)였다. 유세비우스는 예수시대의 정치적 사건들을 언급한 복음서에 대한 독립적 증거로서 요세푸스를 광범위하게 인용하는데, 인용할 때마다 다르게 인용한다. 다시 말해서 요세푸스의 텍스트가 고정적이질 않았다는 증거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요세푸스의 『유대인 고대사』의 예수 단락 자체가 유세비우스 자신의 날조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선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이라는 표현은 매우 인위적이다. 한 인간으로서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 대단하다는 긴장감을 삽입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라는 표현도 해괴하다. 요세푸스는 유대사를 유대인이 아닌 로마인들을 위하여 쓴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 즉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표현은 매우 어색하다. 유대인을 빼놓고는 아무도 알아들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로마인들에게는 그냥 “그는 기름을 뒤집어쓴 자였다”라는 이상한 말로 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리게 된 족속”이라는 표현도 특이하다. ‘족속(phyl)’이라는 표현은 객관화될 수 있는 한 국적의 인종을 말한다. 후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을 ‘제3의 인종’으로 규정하여 말하는 용례가 있기는 하지만 요세푸스 시대에는 그토록 그리스도인들이 별개의 인종적 그룹으로서 특화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여튼 이 요세푸스의 기록은 유대인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기독교적이고, 공평한 사가의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신앙고백적이며,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복음서의 기술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 기록을 반드시 후대 기독교인들의 날조라고 볼 수만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첫째, 필사자들이 약간의 변경을 했을 수 있다 할지라도 그 전체를 날조했다고 주장할 만한 확실한 근거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날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토록 시시하게 조금만 서술했을 리가 없다. 세례 요한에 관한 기록에 비해 너무 초라하게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문체나 어휘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본다.

나는 이 요세푸스의 증언기록이 완벽하게 날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 부분은 후대에 첨가된 것이라고 단정한다. “우리가 그를 한 인간이라고 불러야만 한다면,” “이 사람은 그리스도였다.” “그는 죽은 지 사흘 만에 생명으로 복귀된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났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에 관하여 이러한 일과 또 셀 수 없는 많은 놀라운 사건들을 예언하여 왔기 때문이었다.”라는 구절을 삭제해 버리면 우리는 역사적 예수에 관한 매우 재미있는 정보들을 얻게 된다. 예수는 현인(賢人)이었으며, 믿기 어려운 공적을 행한 일꾼이었으며,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진리의 스승이었다. 여기에는 이적이나 부활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지체 높은 지도자들에 의해 고소되었고, 빌라도 자신의 판단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형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요세푸스 시대에까지 그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요세푸스의 사가로서의 기술은 우리에게 별다른 새로운 정보를 전하지는 않는다. 이제 우리는 풍요로운 복음서의 기술 속에서 역사적 예수를 발굴하는 작업으로 진입해야 한다. 그 작업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처형된 AD 30년과 마가복음이 집필된 AD 70년 사이 40년간의 역사에 관한 매우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통찰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바로 도마복음서의 발견이었던 것이다.

출처 :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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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푸스보다 약 1세기 뒤에 저술을 남겼던 초대교회 교부 "오리겐"은 요세푸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오리겐은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지 않았다"라고 그의 저서인 (Against Celsus i. 47 : Commentary on Matthew 10. 17)이라는 책에서 언급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요세푸스의 책이 누군가에 의하여 수정 혹은 편집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도 갖을 수 있다.
요세푸스는 분명히 예수를 메시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다. 또한 그 책들은 도미티안이라는 의벽증과 광적인 반유대사상을 가진 로마황제의 통치말엽에 씌어진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세푸스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기록하였을까?
그러나 요세푸스의 유대사 20권에는 더 이상의 예수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요세푸스의 다른 작품인 유대 전쟁사(History of the Jewish War)라는 역본이 있다.
유대 전쟁사는 로마의 힘과 위용을 떨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씌어진 책이며, 그가 로마황제의 가신이 되자마자 그가 처음 저술한 책이다.
이 유대전쟁사는 아람어 역본과 헬라어 역본 두가지로 간행되었다고 하며, 아람어 역본은 전해져 있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11세기, 유대전쟁사의 슬라브어 역본(고대 러시아 역본)이 발견되었다.
이것이 뒤에 독일어로 번역이 되어 발간되어지는데 이 내용이 헬라어 역본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이것을 연구한 학자들은 그 슬라브어 역본이 아람어를 번역한 것이라고 견해도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앞에서 언급한 유대사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는 것을 학자들은 발견하였다.

   그 때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만일 그를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적인 본성과 모습을 가졌으
   나 초인적인 풍채를 지니고 있었으며 신묘한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로서는 그를 단순한 인간이라고 부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 만일 그의 본성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것임을 생각해 보면 그를
   천사라고 부를 수도 없다. 보이지 않는 능력을 통하여 그가 행한 모든 일
   은 말과 명령으로 역사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율법
   을 주신 그 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보
   이셨다"고 내게 말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글은 계속하여 빌라도와 십자가 처형에 이르기까지를 기록하고 있었다.(유대전쟁사 ii. 174)
이러한 요세푸스의 글은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용을 담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구절은 마태복음과 매우 유사한 기록이 있음으로 볼 때에, 요세푸스가 혹시 마태복음을 읽고 인용하지 않았는가 하고 학자들은 견해를 피력하고 있을 정도이다.
또한 유대전쟁사 5권에는 예루살렘성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성전의 바깥 뜰에 있던 당시의 "경고문"이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 경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통치하지 않았던 왕 예수는 예루살렘의 도시의 파괴와 성전의 황폐를
   예언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5권 195에 삽입된 내용. 경고문은 309)

더군다나 예수가 죽을 때에 성소의 휘장이 찢겨진 내용(막15:38)을 요세푸스는 기록하고 있다는 것은.... 마가복음의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증거는 요세푸스의 책 도처에서 매우 많이 발견되어진다.....

이제 결론적으로 정리를 하자.
요세푸스는 예수를 만난 적이 없었다. 예수가 죽은 후에 요세푸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서를 기록한 예수의 제자들보다 후대의 사람으로서, 예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고 있었고, 또 예수에 대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이나 목격담, 혹은 문헌등을 듣고,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쓴 유대사는 그가 로마황제의 가신으로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는 적어도 로마측 입장에서 쓸 수 밖에는 없었던 점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예수에 대한 기록은 성경과 상당부분이 일치한다.

요세푸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인구조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단 그는 AD 7년의 구레뇨의 인구조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BC 4년경)나 구레뇨의 인구조사(AD 7년)의 일은 요세푸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라는 점을 우리는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그는 아마 그것을 다른 문헌이나 전승을 통하여 기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터툴리안을 알고 있을 것이다.
Justin 이 저술한 First Apology 34. 2: Tertullian, Against Marcion iv, 7.19를 보면 터툴리안이 이렇게 말하였다는 이러한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 주님의 탄생을 즈음하여 있었던 인구조사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치세에 관한 관공문서고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누구든지 이 문서고를 조
   사해 보는 수고만 아까지 않는다면 요셉과 마리아의 명단이 거기에 호적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져스틴의 책에 의하면, 터툴리안은 마리아와 요셉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문서고를 찾아 보면 호적에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문서고는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당시에는 그 문서고에 마리아와 요셉의 호적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인구조사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분명히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 인구조사가 예수님의 탄생에 즈음하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더군다나 져스틴의 같은 책 48. 3.을 올려본다.

   예수께서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본디오 빌라도 행전을
   (Acts of Pontius Pilate) 통하여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본디오빌라도 행전이라는 책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져스틴은 예수가 행한 기적들이 그 당시에는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본디오빌라도 행전이라는 책을 통해 알 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본디오 빌라도가 자신의 치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면, 분명히 예수에 대한 기록이 있었을 것이다.
져스틴은 예수가 실존인물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고, 예수가 어떠한 일련의 기적을 행하였는가 아닌가에 대한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빌라도라는 인물이 예수님이 행한 기적에 대해서 기록하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증거는 이스람교의 경전인 코란에서도 발견된다.
코란에서는 계속적으로 일정하게 예수를 "이사 이븐 마리암(Isa ibn Maryam)"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는 뜻이다.
또 코란에서는 예수를 "알 마시(Al-Masih)"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메시야라는 뜻이다.
물론 코란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있지만, 예수라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실존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가 메시야임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출처 : Jesus is My Bl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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