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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사회

"감히 내 머리를!"…조조가 죽인 화타의 진실은?

[이상곤의 '낮은 한의학'] 화타 이야기

기사입력 2010-07-28 오전 8:30:24


한의학에도 외과 의학이 있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은 화타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조조의 머리를 쪼개서 치료하겠다는 대담한 발상이 <삼국지연의>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화타의 신기에 가까운 외과 의학의 전통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화타의 의학은 그저 전설일 뿐일까?

이런 수수께끼를 풀려면 불교 경전을 살펴야 한다. 불교 경전에는 지바카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인도 문명의 발상자인 인더스 강 상류에 고대 도시 타키시라가 있었다. 이 도시에는 뛰어난 의사 지바카가 있었다. 이 의사의 치료 일화는 불교 경전 곳곳에 수록돼 전해진다.

구섬미국 장자의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다. 상여에 실리고 나서야 지바카가 도착했다. 그는 시신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 사람은 죽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예리한 칼로 배를 갈라 장의 꼬인 부분을 드러내 부모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마차 타기를 좋아하여 장이 꼬인 것이지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장을 본래대로 해 놓고 피부를 꿰매고 약을 발랐다.

이런 개복술과 더불어 개두술도 나온다. 지바카는 머리가 아파서 죽었다는 아가씨의 집으로 가서는 칼로 머리를 파헤쳐 내부의 벌레를 잡고 고약을 발라 꿰맸다. 불경 곳곳에는 오늘날의 외과 수술을 연상하는 이런 지바카의 설화가 여러 차례 반복돼서 나온다. 실제로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상당히 수준 높은 외과 수술이 시행되었다.

이런 인도의 외과 의학을 뒷받침한 것은 수술용 도구다. 수술용 도구는 둔기와 예기로 나뉘는데, 둔기가 101개 예기가 20종류가 될 정도로 많았다. 이런 수술용 도구는 실제로 인도에서 외과 수술이 일상적으로 이뤄졌으며, 그 수준 또한 상당히 높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다.

고대 인도 의학의 특징을 염두에 두면, 화타의 의학은 인도 의학이 중국에 유입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화타 의학의 기원을 중국 전통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의학의 전래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위스 의사학자 지거리스트의 이야기는 나름 해답을 준다.

"어떤 세기에 수준 높은 외과 지식이 있었던 사실을 발견하더라도 문헌 증거가 없기 때문에 그 지식의 근원은 알기 어렵다. (…) 의학적 관념을 어떤 문화로부터 다른 문화로 옮길 수 없다. 그러나 외과 기술은 그렇게 될 수 있다. 운하나 건축물처럼 수술은 다른 나라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수술 지식이 대륙에서 고루 퍼질 수 있었다."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고대 인도의 명의 지바카의 설화는 중국에서 화타나 그와 더불어 최고의 명의로 불린 편작의 설화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이들 설화에는 죽음, 장례, 기사회생의 삼단계가 공통적인데, 다음과 같은 편작의 설화는 그 전형을 보여주는 예다.

"편작이 괵나라를 지나가는데 괵의 태자가 죽었다. 죽은 지 반나절이 되지 않아 도착한 편작은 쇼크사로 규정하고 침을 찔러 기사회생시킨다."

▲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화타의 외과 의학은 전설일까? ⓒmoneydj.com
 

화타 역시 마찬가지다. <삼국지연의>에는 화타의 진료 기록이 스물한 군데 나온다. 이 중에는 지바카 설화의 개복술과 같은 치료 기록도 있다.

병이 덩어리가 되어 안에 있는데도 침이나 약이 그것에 미치지 못하여 수술해야만 하는 사람은 마비산을 마시고 있으면 바로 취하여 죽은 듯이 알지 못한다. 이때 갈라서 병 덩어리를 꺼낸다. 병이 장속에 있으면 장을 갈라 병 덩어리를 꺼내고 씻고서, 배를 꿰매고 고약을 바른다.

이런 병을 앓는 사대부가 있었다. 화타가 말하기를 "당신은 병이 심하다. 마땅히 배를 갈라야 한다. 그렇게 병 덩어리를 빼면 당신은 10년은 살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자진해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 사대부는 화타의 의견을 따랐다. 화타가 손을 대 아픈 곳을 찾아내 고쳤고, 그 사대부는 10년이 지나 죽었다.

관우의 기록도 대표적이다. 관우가 독화살로 한쪽 팔을 쓸 수 없게 되자 화타는 칼로 살을 쪼개고 독을 긁어낸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역시 조조의 기록이다. 두통이 심하여 견딜 수 없게 되자 진맥한 화타가 이렇게 조조에게 수술을 권한다.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도 위험한 두 개술이었다.

"대왕의 머리가 아픈 것은 머릿속에 바람이 일기 때문입니다. 병의 뿌리가 골을 싸고 있는 주머니 안에 있으니 약으로는 고칠 수 없습니다. 마비탕을 드시고 잠든 후에 머리를 쪼개 그 안에 바람기를 걷어 내야 합니다."

화타가 말한 마취약인 마비산은 어떤 약일까. 마비산은 대마와 만다라화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마는 의서의 곳곳에 향정신성 약으로 기록돼 있다. <신농본초경>은 "많이 먹으면 사람이 귀신으로 보여 달아난다"고 했고, <명의별록>은 "인삼에 섞어 먹으면 앞일을 미리 안다"라고 말했다.

<중약대사전>을 보면, 만다라의 마취 약효가 구체적으로 나온다.

"만다라는 독이 있는데 종자의 독성이 특히 강하다. 가지과의 식물로 흰독말풀 종류이다. 세 알만 씹어도 중독이 될 수 있으며 맥박이 빨라지고 동공이 확대된다. 다량으로 먹으면 혈압이 내려가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조조는 암살의 공포로 평생을 떨었던 사람이다. 평생 듣도 보도 못한 치료법으로 머리를 쪼갠다는 말을 들으니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예상대로 화타를 옥에 가뒀다. 측근들이 살려줄 것을 간청했지만 조조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결국 화타는 죽임을 당했다. 화타는 의사가 된 것을 후회하며, 자신의 의술을 적은 책을 옥리에게 건넸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옥리도 법을 두려워하여 책을 불태웠다. 한의학에서 외과 의학의 명맥이 끊긴 것이다. 조조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지는데다 아들까지 요절하지 뒤늦게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탕액, 침구, 진맥에서 벗어난 이단의 의학은 그렇게 집권층의 무지에 의해서 사라져 버렸다.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