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옛 비밀 조직들
아사신
872년 압둘라 이븐 마이문이 창설한 바티니스파(Batinis)는 아사신파를 낳을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노시스파에서 수학한 철저한 유물론자인 압둘라는 자신이 속한 이스마일파를 포함해 모든 구조화된 종교를 철폐하려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독실한 이스마일파 신도로 가장했다.
템플기사단의 금융과 건축
템플기사단은 여행경비를 지역 기사단에 맡기면 특수하게 제작된 영수증을 발급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영수증은 신용증서 형태로 발행되었으며 어떤 지역의 기사단에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나면 남은 경비가 계좌에 현금으로 적립되었고, 초과된 부분은 청구되었다. 이는 현대의 수표 계좌나 신용카드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샤르트르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많은 감탄을 자아냈다. 가드너는 "고딕 스테인드글라스는 해로운 자외선을 유익한 빛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현대의 과학적 공정과 화학도 아직 그 신비를 풀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가드너는 이와 함께 고딕 스테인드글라스를 완벽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페르시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성당을 세운 템플기사단이 동방 아사신파의 지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다.
샤르트르대성당 북문의 작은 기둥 윙는 계약의 궤를 바퀴 달린 수레에 실어 옮기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각을 계약의 궤와 결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아래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이다. 연구자들은 그 내용을 "여기에 궤가 숨겨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여기서 궤가 사랑받고 복종을 받으리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동정녀 마리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돌 조각도 있는데, 여기에도 '계약의 궤(arcis foederis)'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로슬린성당의 바닥 건축 계획이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중요한 기둥을 포함해 예루살렘 솔로몬 사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템플기사단의 붕괴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슬린성당 통로 위의 아치와 천장에서 옥수수 열매와 알로에 선인장을 묘사한 것이 분명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인디언의 옥수수 열매가 처음을 유럽과 아프리카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탐험가들을 통해서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로슬린성당이 완공된 것은 1486년으로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기 6년 전이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에서 유래했다는 글을 최초로 썼던 독일 수도승 발트시뮬러가 템플기사단 및 만다이파의 '메리카' 전설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 수도승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과 탐험가 베스푸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두 가지를 연결지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발트시뮬러는 이름을 올바로 듣긴 했는데 설명은 틀리게 했다. 문제의 글을 쓴 직후, 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세계의 발견자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철회했지만 그 내용은 이미 널리 퍼져버렸다"고 설명했다.
메로빙거 왕조
가드너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직접 나서서 통치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활동적인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을 모델로 삼았다. 그들의 통치 형태는 주로 《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메로빙거 혈통의 왕좌 복귀 시도는 계속 되풀이되었는데 18세기에 단 한 번 거의 성공할 뻔한 사례가 있었다. 베이전트와 리, 링컨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혼인 덕분에 메로빙거의 후예인 로렌 가문은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제국(1806년까지 존속)의 왕좌를 손에 넣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프랑스의 왕좌 또한 한 세대 동안 메로빙거 혈통이 차지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1800년대 초반 합스부르크 로렌 왕가는 유럽 전체를 지배할 기틀을 닦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합스부르크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어 오스트리아제국에 한정되었고, 이 제국은 페르디난드 황태자 암살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되었다.
아사신
872년 압둘라 이븐 마이문이 창설한 바티니스파(Batinis)는 아사신파를 낳을 씨앗을 품고 있었다. 그노시스파에서 수학한 철저한 유물론자인 압둘라는 자신이 속한 이스마일파를 포함해 모든 구조화된 종교를 철폐하려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독실한 이스마일파 신도로 가장했다.
템플기사단의 금융과 건축
템플기사단은 여행경비를 지역 기사단에 맡기면 특수하게 제작된 영수증을 발급하는 체제를 만들어냈다. 이 영수증은 신용증서 형태로 발행되었으며 어떤 지역의 기사단에서든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여행이 끝나면 남은 경비가 계좌에 현금으로 적립되었고, 초과된 부분은 청구되었다. 이는 현대의 수표 계좌나 신용카드와 유사한 방식이었다.
샤르트르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많은 감탄을 자아냈다. 가드너는 "고딕 스테인드글라스는 해로운 자외선을 유익한 빛으로 바꿔놓기도 한다. 현대의 과학적 공정과 화학도 아직 그 신비를 풀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가드너는 이와 함께 고딕 스테인드글라스를 완벽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페르시아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오마르 하이얌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성당을 세운 템플기사단이 동방 아사신파의 지식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다.
샤르트르대성당 북문의 작은 기둥 윙는 계약의 궤를 바퀴 달린 수레에 실어 옮기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조각을 계약의 궤와 결정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아래에 새겨진 라틴어 명문이다. 연구자들은 그 내용을 "여기에 궤가 숨겨져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여기서 궤가 사랑받고 복종을 받으리라"는 의미로 보기도 한다. 동정녀 마리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돌 조각도 있는데, 여기에도 '계약의 궤(arcis foederis)'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로슬린성당의 바닥 건축 계획이 입구에 세워진 두 개의 중요한 기둥을 포함해 예루살렘 솔로몬 사원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템플기사단의 붕괴
스코틀랜드에 있는 로슬린성당 통로 위의 아치와 천장에서 옥수수 열매와 알로에 선인장을 묘사한 것이 분명한 그림을 볼 수 있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공식 기록에 따르면 인디언의 옥수수 열매가 처음을 유럽과 아프리카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탐험가들을 통해서였다"는 점을 지적했다. 로슬린성당이 완공된 것은 1486년으로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건너기 6년 전이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이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에서 유래했다는 글을 최초로 썼던 독일 수도승 발트시뮬러가 템플기사단 및 만다이파의 '메리카' 전설에 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그 수도승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과 탐험가 베스푸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단순히 두 가지를 연결지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나이트와 로마스는 "발트시뮬러는 이름을 올바로 듣긴 했는데 설명은 틀리게 했다. 문제의 글을 쓴 직후, 그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닫고 아메리고 베스푸치가 신세계의 발견자라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철회했지만 그 내용은 이미 널리 퍼져버렸다"고 설명했다.
메로빙거 왕조
가드너는 "메로빙거 왕조의 왕들은 직접 나서서 통치하지도 않았고 정치적으로도 활동적인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윗 왕의 아들 솔로몬 왕을 모델로 삼았다. 그들의 통치 형태는 주로 《구약성서》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고 지적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메로빙거 혈통의 왕좌 복귀 시도는 계속 되풀이되었는데 18세기에 단 한 번 거의 성공할 뻔한 사례가 있었다. 베이전트와 리, 링컨은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혼인 덕분에 메로빙거의 후예인 로렌 가문은 오스트리아 및 신성로마제국(1806년까지 존속)의 왕좌를 손에 넣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을 때, 프랑스의 왕좌 또한 한 세대 동안 메로빙거 혈통이 차지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1800년대 초반 합스부르크 로렌 왕가는 유럽 전체를 지배할 기틀을 닦았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합스부르크의 권력은 점차 축소되어 오스트리아제국에 한정되었고, 이 제국은 페르디난드 황태자 암살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붕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