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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타

[중앙시평] 나의 살던 고향은

수백 년에 걸쳐 프랑스와 독일의 지배를 번갈아 받아온 알자스로렌 지방 사람들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 때문에 자기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일이 많았다. 알자스 출신인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박사는 어느 날 자신이 독일어로 꿈을 꾼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기 조국이 독일이요 모국어가 독일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그윽한 경계에 놓인 꿈은 언어의 뿌리이자 정신의 태(胎)이기도 하다.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 주시경 선생의 경고다. 말을 잃으면 민족의 뿌리도 겨레의 꿈도 사라지고 만다. 밀로라드 파비치의 경이로운 소설 『카자르 사전』은 숙명처럼 얽힌 민족과 언어의 관계를 두렵도록 슬픈 이야기로 그려내고 있다.

리본과 댕기, 슬리퍼와 끌신, 노크와 손기척, 오뎅과 생선묵, 와사비와 고추냉이, 곤색(こん色)과 군청색···. 어느 것이 우리말인가? 외래어에 깊숙이 오염된 우리 말글의 부끄러운 모습이다. 북한은 비교적 순수한 우리말을 적잖이 간직하고 있지만, 어떤 단어들은 이념의 색채로 덧씌워져 본래의 뜻을 잃어버렸다. ‘동무’는 친근한 벗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동지로 둔갑했고, 사물을 스스로 주장한다는 뜻을 가진 ‘주체’는 세계로부터 고립된 세습독재의 정치구호로 변질되고 말았다.

혀를 살짝 굴리는 영어의 R 발음이 부러워 제 아이의 혀 밑 근육을 잘라내는 수술도 마다하지 않는 젊은 엄마들이 있다니, 이런 엽기(獵奇)가 없다. 서울은 물론 웬만한 도시의 번화가는 뜻도 알 수 없는 서양 알파벳 간판들로 온통 뒤덮여 있다.

말이 나온 김에 꼭 짚어두고 싶은 ‘말’이 또 하나 있다. 민족의 애환(哀歡)이 진득이 서려 있는 노래 ‘고향의 봄’에 쓰인 노랫말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일제시대, 열여섯 나이의 이원수 시인이 쓴 동시에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인 ‘고향의 봄’은 일제강점기에 온 겨레가 숨죽이며 불렀던 애끓는 민족애(民族愛)의 절규였고, 광복 후에는 분단의 비극 속에서 혈육을 고향에 두고 온 이산가족들이 밤이면 밤마다 잠자리를 뒤척이며 신음처럼 토해낸 절절한 그리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소중한 겨레의 노래 첫 소절에서는 어떤 이질감(異質感)이 묻어 나온다. ‘나의 살던 고향’이라니, 이런 우리말이 있던가? 관형어(매김말) 다음에는 주어가 오는 것이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어순(語順)인데, ‘나의 살던 고향’은 관형어(나의) 다음에 또 다른 관형어(살던)가 오고 그 뒤에 주어(고향)가 붙어 있어 말의 흐름이 어색하다. 어법(語法)에 맞는 우리말은 ‘내가 살던 고향’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소유격조사 의(の)를 주격조사처럼 쓰는 일본어식 표현 그대로다(私の住んでいだ故鄕). 조선 중기에도 ‘의’를 주격조사로 썼다는 반론이 있지만, 조선 후기와 근세를 거쳐 현대에까지 이어져온 우리의 고유한 언어습관은 아니다.

‘조선이 독립국이며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밝힌 독립선언문마저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이라고 쓰던 시절이니, 일제치하에서 일본 말글을 배우며 자라난 열여섯 살 어린 시인을 탓할 일은 아니다. 게다가 시어(詩語)는 굳이 어법에 얽매이는 것도 아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우리가 길이 간직해야 할 민족수난의 아픔, 그 슬픈 흔적일 터이니, 이제 와서 새삼스레 시비를 벌일 이유는 없겠다. 그러나 이원수 시인 자신은 아무래도 찜찜한 느낌을 떨치기 어려웠던지, 일찌감치 바로잡지 못한 것을 생전에 늘 아쉬워했다고 전해진다.

‘민족적’이라는 말은 기실 민족적이지 않다. 일본식 한자인 적(的)은 영어의 형용사어미 tic을 음역(音譯)한 것으로 중국어의 관형어인 적(的)·저(底)와도 다른 것인데, 우리가 분별없이 남용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범죄와의(との) 전쟁, 통일에의(への) 염원, 아래로부터의(からの) 혁명’처럼 일본어에서 그대로 옮겨온 겹토씨(複合助詞)를 정부와 언론과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쓰고 있으니, 정말 일본식 겹토씨와 전쟁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속 좁은 민족감정 때문이 아니다. 광복 65주년에도 우리 말글의 광복은 아직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이다.

민족의 슬픔과 겨레의 꿈을 간직한 노래 ‘고향의 봄’을 이렇게 고쳐 불러본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대표·전 서울중앙지방법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