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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화

김수로가 정말 한반도 김씨의 시조였을까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김수로>, 첫 번째 이야기
10.06.05 15:10 ㅣ최종 업데이트 10.06.05 18:42 김종성 (qqqkim2000)
 


가야 토착 집단, 김수로 집단, 석탈해 집단, 허황옥 집단이 한반도 동남부를 무대로 새로운 문명의 주도권을 놓고 운명적 대결을 펼친 1세기 가야 건국의 현장. 아직까지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이 시기의 한국 고대사를 다룬 드라마 <김수로>가 지난 5월 29일 첫 전파를 탔습니다.

 

이 드라마가 갖는 의의 중 하나는 한민족을 형성한 몇 갈래의 시원 중 하나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입니다. 이에, '사극으로 역사읽기' 시리즈에서는 드라마 <김수로>에 대한 비평문을 통해 가야 건국의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 시리즈에는 기존의 <동이>와 함께 <김수로>에 대한 글도 정기적으로 실릴 것입니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기대합니다.... 기자주

 

  
MBC 드라마 <김수로>. 사진은 주인공 김수로 역을 맡은 배우 지성.
ⓒ MBC
김수로

동아시아 북방의 대초원을 무대로 한 제천금인족(祭天金人族)과 중국 후한(後漢, 후기 한나라, 25~220년)의 한판 대결. 이 전쟁에서 제천금인족이 패배하는 것에서 드라마 <김수로>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쫓기는 신세가 된 제천금인족 족장의 부인 정견비(배종옥 분). 그의 몸속에는 새 생명이 잉태되고 있다. 자신의 아들이 장차 왕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정견비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고구려로 가는 배편에 몸을 싣는다.

 

그런데 그 배는 고구려가 아닌 한반도 동남부의 구야국으로 향하는 노예선. 추격자가 정견비를 향해 칼끝을 들이대는 순간, 굉음과 함께 배는 풍랑을 맞아 좌초하고 만다. 배가 표류한 곳은 노예선 주인이 원래 의도했던 구야국.

 

훗날 가야 건국의 현장이 될 구야국에 우연히 표류한 정견비. 그 뱃속에 있는 아이가 초대 가야국왕이 될 김수로(지성 분)라는 게 드라마 <김수로>의 스토리다. 쇳소리 요란한 구야국에서 김수로와 토착집단이 펼칠 운명적 대결이 이 드라마의 볼거리다.

 

이상의 내용은 물론 역사적 사실이 아니다. 픽션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속에는 가야 건국의 미스터리와 관련된 열쇠 하나가 담겨 있다. 그것은 가야의 초대 국왕인 김수로가 한반도 원주민이 아닌 북방민족의 후예라는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김수로가 제천금인족 즉 흉노족 일파의 후예라고 설정되어 있다.

 

이러한 설정은 김수로가 북방민족 출신이라는 최근의 가야사 연구와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970년대에 재야사학자 문정창이 <가야사>라는 책을 통해 '김수로는 흉노족 출신'이란 주장을 전개한 이래, 오늘날에는 가야사의 권위자인 신경철을 비롯한 제도권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가야 건국세력은 북방 유목민족 출신'이란 인식이 퍼져나가고 있다.

 

김수로가 정말로 흉노족 혹은 북방민족 출신인가 하는 문제는 드라마 <김수로>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단계적으로 차근차근 다루어 나가기로 하고, 이번 기사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실관계 하나를 제시하고자 한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김(金)이라는 성을 사용한 집단이 누구였는가 하는 점이다.

 

흔히들 김씨는 한국 고유의 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객관적 사실과 명확히 배치된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김씨가 출현하기 전부터 한반도 밖에서 이미 김씨 집단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야사에 관한 현존 최고(最古)의 사료인 <가락국기>에 따르면, 김씨의 시조인 김수로가 한반도 동남부에 출현한 시점은 서기 48년이다. 그러므로 한반도에서는 서기 48년이 김씨의 최초 출현 연도라고 할 수 있다.

 

  
김수로의 무덤인 납릉.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소재.
ⓒ 김종성
납릉

한편, <삼국사기> '탈해이사금 본기'에 따르면, 김씨의 또 다른 시조인 김알지가 신라에 출현한 시점은 탈해이사금 9년(서기 65) 음력 3월이었다. 김알지는 김수로보다 17년 늦게 출현한 것이다. 김수로와 김알지의 사례를 종합하면, 한반도에 김씨가 처음 출현한 것은 어느 경우에도 서기 1세기 이후였다.

 

그런데 한반도의 김씨 시조들보다 훨씬 오래 전에 이미 김씨 성을 사용한 집단이 있었다. 한나라(전한, 기원전 202~서기 8년)의 역사를 기록한 반고의 <한서>에서 그들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야기는 한나라의 제7대 황제인 한무제(재위 기원전 141~87년) 때로부터 시작한다.

 

동아시아 최강의 유목민족인 흉노족의 만성적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심한 한무제는 원수(元狩) 연간 즉 기원전 122~117년 사이에 곽거병 장군을 파견해 흉노족 일파에 대한 공격을 단행했다. 이 전투에서 곽거병 부대는 흉노족 휴도왕(休屠王)의 태자를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 이때 붙들린 태자의 이름은 일제(日磾)였다. 

 

  
흉노족의 활동무대 중 하나였던 내몽골 초원.
ⓒ 김종성
내몽골

한나라에 끌려온 태자 일제는 '탈출'보다는 '적응'을 선택했다. 그는 치욕을 무릅쓰고 한무제의 말을 관리했다.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무제의 신임을 받은 태자 일제는 훗날 산동성 지역의 제후인 투후(秺侯)에까지 책봉되었다.

 

이 성실한 흉노족 태자에 대한 신임의 표시로, 한무제는 그에게 선물 한 가지를 주었다. 바로 사성(賜姓)이었다. 성을 내려준 것이다. 그 성이 바로 김(金)이었다고 <한서> '김일제 열전'은 전하고 있다.

 

그럼, 한무제가 하필이면 김이라는 성을 하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해 '김일제 열전'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래 휴도(休屠)에서는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김이라는 성을 내리게 되었다고 한다."(本以休屠作金人為祭天主,故因賜姓金氏云)

 

  
<한서> 권68 ‘김일제 열전’. 밑줄 친 부분은 본문에 인용된 내용. 사진은 중국사 연구에서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대만의 중앙연구원(http://hanji.sinica.edu.tw)이 제공하는 25사(史) D/B. 이 사이트에서는 역사서를 포함한 중국 고전들의 원문을 제시하고 있다.
ⓒ 대만 중앙연구원
한서

이에 따르면, 흉노족 휴도 사람들은 천신에게 제사를 지낼 목적으로 사람 모양의 금상(金像)을 제작했다. 그 금상을 제천금인(祭天金人)이라고 했다. 제천금인을 숭상하는 종족의 후예라고 하여 태자 일제에게 김이라는 성을 하사하게 되었다는 것이 '김일제 열전'의 설명이다. 동아시아에서 최초의 김씨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런 점을 보면, 김수로가 한반도에 등장하기 이전인 한무제 시대에 흉노족 일파가 이미 김씨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김씨의 원조는 흉노족이었던 것이다. 김씨의 시작은 이미 한반도 바깥에서 오래 전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김씨 성을 갖고 한나라에 정착한 김일제의 후예들은 훗날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적어도 기원전 66년 이후로는 한나라 조정이 김일제의 후예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었다.

 

이들의 권세는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서기 8년에 신나라를 세운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왕망이 김일제 가문과 고도의 제휴관계를 유지하며 그들을 국정운영에 참여시켰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서기 23년에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2년 뒤인 서기 25년에 후한이 들어서면서부터 김일제의 후예들은 왕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김일제의 후예들이 중국에서 사라진 시점과 김수로 집단이 한반도에 출현한 시점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한 때는 서기 23년이고, 가야가 건국된 때는 서기 48년이다. 중국에서 김씨 일족이 사라진 때로부터 불과 25년 뒤에 가야 땅에 김씨 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김일제의 후예들과 김수로 집단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그들은 혹시 같은 집안이 아닐까?

 

이 문제에 관한 해답을 드라마 <김수로>에서 얼마나 충실히 제시할 것인가에 주목한다면, 드라마를 시청하는 즐거움이 한층 더 배가될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도 드라마의 스토리 전개에 따라 위의 의문을 포함해서 김수로·허황옥·석탈해의 출신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하나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단일민족이 아니라, 실은 여러 갈래가 어우러진 다민족인 우리 한민족의 시원을 함께 규명하는 자리가 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