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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내경의 기원

黃帝內經槪論
황제내경개론

『史記』 倉公傳에는 倉公이 高後 8년(기원전 180년)에 스승인 陽慶을 알현하고 陽慶으로부터 일선의 의서를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각주:1]

 

 1)『黃帝扁鵲之脈書』―切脈(脈診)에 대하여 설명한 책.
 2)『上下經』―『素問』의 疏五過論篇과 陰陽五行論에는 『上下經』이라는 책 이름이 보인다. 또 氣交變大論篇에는 『上經』의 문구가, 痿論篇에는 『下經』의 문구가 인용되어 있다. 『素問』의 病能論篇을 보면 「『上經』은 氣가 하늘에 통하고 있는 것을, 『下經』은 질병의 변화를 말한다」라고 씌어 있다.
 3)『五色診』―『素問』의 玉版論要篇에 「『五色』, 『脈變』, 『揆度』, 『奇恒』 등의 의서에서 말하고 있는 道는 하나이다 」라고 씌어 있다.
 4) 『奇咳術』―『素問』의 病能論篇에 「『奇恒』은 奇病에 관한 것을 말한다 」라고 씌어 있다. 「咳」의 본래 글자는 「侅」이다. 許愼의 『說文解字』에서는 이 「侅」자를 「[侅]란 奇侅, 보통이 아닌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奇咳術」이란 바로 「非常術」의 의미로서, 어떤 이상한 종류의 질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일 것이다.
 5) 『揆度』―『素問』의 玉版論要篇에 「揆度란 병의 깊이를 측정하는 것이다」라고 씌어 있으며, 病能論篇에서는 「『揆度』란 觸診하는 것, 揆란 병을 탐지하고, 度란 四時를 推察하여 병의 소재를 찾는 것을 말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揆度』란 진단학에 관한 책으로 볼 수 있으며, 予後에 대한 것도 당연히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6) 『陰陽外變』―陰陽의 이론을 설명한 책.
 7) 『藥論』―『神農本草經』의 前身
 8) 『石神』―砭石學에 대하여 전한 책. 刺針療法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9) 『接陰陽禁書』―역시 陰陽이론에 대하여 서술한 책.

『素問』의 疏五過論篇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上經』, 『下經』, 『揆度』, 『陰陽』, 『奇恒』의 다섯 책을 익히고 明堂으로 진단하여 질병의 전말을 소상히 밝히면 천하무적이다.

당시는『黃帝內經』이라는 명칭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黃帝扁鵲之脈書』라고 하는 책에 의해서, 의서와 황제의 관계가 이미 발생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黃帝內經』의 사상이 道家의 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점

皇甫謐이 편찬한 『甲乙經』의 自序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七略』의 藝文志에 수록되어 있는 『黃帝內經』 18권을 생각할 때 현재 『針經』 9권과 『素問』 9권이 있다.
 
唐代에 이르러 그 내용이 『針經』과 유사한 책이 출현했는데 王永은 이것을 『靈樞』라고 부르고 있다.

方孝孺의 『遜志齊集』 卷4 · 讀三墳書의 말―"그러나 세상에는 가짜 책이 많다. 예컨대 『內經』을 황제시대의 책이라 하는 것은 戰國 · 秦 · 漢代 사람의 저작이다. 그런데 이 책들은 진본이 아니기는 하나 매우 오래된 것이므로 취할 바가 많다.

胡應麟의 『少室山房筆叢』 卷32의 四部正訛 · 下의 말―"『素問』은 그 책 이름은 거짓이기는 하나 내용은 거짓이 아니다."

催述의 『補上古考信錄』 卷上 · 黃帝說의 말―"전국시대의 揚 · 黑의 무리(揚朱派 · 黑子派)는 유교에서 숭배하는 堯나 舜을 거부하고 堯 · 舜 이전의 黃帝를 더욱 뛰어난 성인으로 숭배했다.

 『素問』은 어느 한 사람의 손에 의하여 저작된 것이 아니고 또 특정 시대에 만들어진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淪洲翁이라고도 부르던 呂復의 다음과 같은 말이 元의 戴良의 『九靈山房集』 卷27에 실려 있는 <淪洲翁傳>에 인용되어 있다.

『內經素問』은 세상에서 黃帝와 岐伯 사이의 문답을 기록한 책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내용을 보면 한 시기에 저작된 책은 아니고 편찬도 한 사람의 손에 의한 것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그 대략은 마치 『禮記』가 漢代의 儒者의 말을 모아 孔子나 子思의 말처럼 전해져 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淸代에 와서는 姚際恒이 다시 일보 진전된 분석을 하였다. 『古今僞書考』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素問』에 나와 있는 말 중에는 옛말과 새로운 말들이 혼합되어 있어서 성립시기를 일률적으로 논할 수가 없다.

『史記』 扁鵲傳에 실려 있는 扁鵲의 치험례 중에서 논하고 있는 병리 · 진단 · 치료법에서는 陰陽에 관하여 논하고 있기는 하지만 五行까지는 논하고 있지 않다. 이같은 점에서 볼 때 『素問』은 扁鵲의 시대 이후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따.
『史記』 倉公傳에 실려 있는 倉公의 26종의 치험례 가운데 湯液(藥物療治)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12가지가 있다. 구체적인 약물요법은 『素問』의 가운데에서 6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데 그것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素問』은 倉公의 시대 이전에 저작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陰陽五行說은 鄒衍에 의하여 발전 · 완비되었다. 이로부터 『素問』의 전기 저작의 주요 부분 중 陰陽五行說을 말하지 않는 부분은 아마 기원전 4세기의 저작, 陰陽五行說은 을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기원전 3세기 중엽의 저작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素問』이라는 책에는 간혹 3세기 이후의 작품도 혼입되어 있다. 『四庫全書明目錄』 卷10의 『黃帝素問』 항에,

 이 책은 오랜 옛날에 만들어졌다고 말해지고 있으나 본디 그러한 책은 없다.


『靈樞』 通天篇에는 「太陰人」, 「少陰人」, 「太陽人」, 「少陽人」, 「陰陽和平人」이라고 하는 다섯 종류의 사람의 유형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靈樞』의 陰陽二五人篇에서는 오행의 관점에서 인간을 크게 다섯 유형으로 분류하고 이 유형 하나하나를 다시 角 · 微 · 宮 · 商 · 羽의 오음에 의한 다섯 종류의 작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즉, 인간이 전부 25종의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는 것이다.

혈액순환이라고 하는 생리현상에 대한  『黃帝內經』의 초보적인 인식은 어느 학설보다 먼저였다.

『靈樞』 邪氣藏府病形篇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上工은 열에 아홉을 고치고 …中工은 열에 일곱을 고친다.…下工은 열에 여섯을 고친다. (『難經』 13難에서는 이 글을 인용하면서 「中工十全七」이라는 구절을 「十全八」이라고 잘못 옮겨놓고 있다.)

 『周禮』의 天宮家宰疾醫의 條에 「십에서 사를 잃은 자를 下라고 한다」라는 것은 왜일까. 鄭玄의 注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 있다.

四를 잃은 자를 下等이라 하는 것은, 열 명의 환자가 있으면 절반인 다섯 명은 치유하지 않아도 스스로 낫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五臟과 五行의 배당에 대해서는 고대의 의술가에 두가지의 다른 설명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黃帝內經』에서 말하는 肝 - 木, 心 - 火, 脾 - 土, 肺 - 金, 腎 - 水라는 배당이며, 다른 하나는 『陰陽療疾法』에서 말하는 脾 - 木, 肺 - 火, 心 - 土, 肝 - 金, 腎 - 水(『淮南子』 時則訓도 이와 동일. 『呂氏春秋』 十二紀와 『禮記』 月令은 「心 - 土」를 뺐으며 그 이외에는 이와 동일)라는 배당이다.  『陰陽療疾法』도 고대의 의서로서 일찌기 소실된 것이기는 하나, 여기에서 말하는 五臟과 五行의 배당에 관한 편린이 『周禮』 秋官大司冠의 「以肺石達窮民」이라는 구절에 붙인 賈公彦의 주해에 인용되어 있다.
 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배당은 漢代의 經學者들의 설명에서도 마찬가지로 존재하고 있어서 古文說과 今文說은 전연 다르게 되어 있다. 『今文尙書』에서 歐陽生이 설명한 배당에는  肝 - 木, 心 - 火, 脾 - 土, 肺 - 金, 腎 - 水라고 되어 있으며, 『古文尙書』의 배당에는 脾 - 木, 肺 - 火, 心 - 土, 肝 - 金, 腎 - 水로 되어 있다(『禮記』 月令 · 孟春의 「祭先脾」의 구절에 붙어 있는 孔頴達의 <正義>가 인용한 許愼의 『五經異義』에 보인다). 분명히 『黃帝內經』은 今文의 설, 『陰陽療疾法』은 古文의 설임을 알 수 있다.

『黃帝內經』 전체에서 藥物書의 인용은 부분은 한 곳도 없으며, 당시의 치료에서는 약물요법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의학의 기초이론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陰陽』과 『陰陽十二官相使』라고 하는 두 책의 명칭에서 시작하여, 당시는 陰陽이론만이 쓰여졌고 五行이론은 아직 쓰여지고 있지 않았다. 五行說은 『黃帝內經』의 시대에 와서 처음으로 의술가에 채용됐던 것이다.


三焦와 위 · 대장 · 소장 · 방광은 아주 비슷하게 닮은 같은 류의 기관이며 내부가 비어 있어서 물질을 담고 내보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難經』 25難에서는 「명칭는 있으나 형체는 없다」라는 것은 三焦라는 명칭은 있어도 그 실체는 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難經』의 해석은 매우 애매하지만 漢의 張仲景의 『傷寒論』에서 淸의 吳瑭의 『溫病條升』에 이르기까지 역대 의술가는 모두 이 『難經』의 해석에 기초하여 三焦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三焦를 실제로는 體幹部의 上 · 中 · 下 세 부분으로 보고 있었다.

三焦를 현대의 해부학 · 생리학의 지식을 가지고 말하면, 그 형체와 기능은 상응하지 않고 형체는 형체, 기능은 기능으로 전연 별개의 것이었다.


황제내경의 기원을 논하기에 앞서 황제내경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이 있는 책을 먼저 소개했다. 황제내경의 기원에도 위 책을 인용한 부분이 있으니 먼저 읽고 들어가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영추』·『소문』과 『황제내경』은 같은 책인가
 편과 권은 다른 것인가
『황제외경』은 현존 『황제내경』의 후속편인가
『난경』의 인용문은 『영추』와 『소문』에서 비롯된 것인가
『영추』와 『소문』은 함께 만들어진 책인가
『황제내경』은 언제, 무엇 때문에 소실되었으며 『영추』, 『소문』은 언제, 누가 편집하였는가
『황제내경』은 어떤 책이었을까
  금방서(禁方書)
 『맥서』와 '황제 편작의 맥서'
  황제(黃帝)와 의서
 『황제내경』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영추(靈樞)』, 『소문(素問)』은 전면적으로 중국 고대 의학의 이론과 경험을 총괄하였으며, 당시의 의학적 성과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었다. 중국
의학의 기본 이론, 예를 들어 음양오행학, 장상학, 침구경락학 중 이 두 서적에 연원을 두지 않은 것이 없다. 『영추』, 『소문』 및  『황제내경』이란 서적의 명칭 및 그 실제 내용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황제삼부침구갑을경·서』에서,
  『칠략』, 『예문지』를 살펴보면, '황제내경 18권'이라 되어 있다. 지금 『침경』 9권과 『소문』 9권이 있어 2×9=18권이 되니, 이 둘이 곧 『내경』이다.

『소문』이란 이름이 결코 『수서·경적지』에 처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장종징(張仲景)의 『상한잡병론』 서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야오지헝이 "어쩌면 후대 사람이 『내경』을 발견하여 그 내용을 부연함으로써 『소문』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은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이다.
『영추』, 『소문』 성립 시기의 하한이 리우시앙(劉向)이 서적을 교정정리하던 시기보다 후대일 수 있으며, 후한까지도 내려갈 수 있다고 보았다.

"『황제내경』 18권"이란 기록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 첫째, "『황제내경』 18권"이 권 안에 편이 있는 체재(體裁)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둘째, "『황제내경』 18권"이 실제로는 『황제내경』 18편이 경우이다.
우리는 「방기략」에 실린 『황제내경』 18권, 『외경』 37권이 『황제내경』 18편, 『외경』 37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황제내경』과 『황제외경』은 순서에 따라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르언잉치우(任應秋)는 「황제내경연구십강」에서,
 고대의 의서를 왜 『내경』이라 불렀을까? 『한서·예문지』의 목록을 살펴보면 한 눈에 알 수 있다. 목록은 다음과 같은데 : 
  『황제내경』 18권, 『외경』 37권; 『편작내경』 9권, 『외경』 12권; 『백씨내경』 38권, 『외경』 36권, 『방편』 35권
 '내' 와 '외'를 보면 단지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지 별다른 깊은 뜻이 없음을 알 수 있다.
『한서·예문지·방기략』에서,
 의경이란 사람의 혈맥, 경락, 골수, 음양, 표리를 궁구하여 온갖 병의 원인과 생, 사의 판별을 제시하고 이로써 잠침(箴針), 폄석, 더운 물 빛 불을 적용해야 할 경우를 헤아리며 각종 약물을 섞어 사용할 적절한 경우를 가늠한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영추』, 『소문』을 단일 서적으로 보게 된 원인은, 두 책의 편집 체재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는 것, 즉 두 문헌이 대부분 황제등의 문답 형식으로 편집되었다는 데 있다.

『영추』와 『소문』의 차이점으로 보아 『영추』, 『소문』은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황제내경』으로 합칭(合稱)하는 것이 부당하다. 두 문헌은 그 최초의 편집본이 어떤 한 시기,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한 선후의 구분이 있다. 때문에 『영추』, 『소문』은 『난경』과 마찬가지로 각각 완전한 독립적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황제내경』이란 문헌명은 『한서·예문지·방기략』에 최초로 나타난다. 『황제내경』이 망실되고 『영추』, 『소문』이 성립된 시기가 전한말 ~ 후한말에 걸치는 시기다.
「방기략」의 의경, 경방이 왕망 집권 말기 또는 후한 말기의 전란 중에 망실되었다.
『영추』란 책은 정확히, 마왕퇴에서 출토된 『족비십일맥구경』, 『음양십일맥구경』, 『맥법』, 『음양대사후』, 또는 장가산에서 출토된 『맥서』, 그리고 『대요』, 『자법』 등의 기초 위에 발전·형성되어 온 것이며, 『소문』이란 책은 『사기·편작창공열전』에서 제시한 고대 의서 『맥서·상하경』 및 『사기·편작창공열전』에서 제시하지 못한 『음양십이관상사』, 『종용』, 『금궤』 또는 장가산에서 출토된 『맥서』 등 20여종의 고대 의학 문헌의 기초 위에 발전·형성되어 온 것이다. 편집 문헌의 편집 작업은 초기에 흔히 어느 한 시기 한 사람의 손으로부터 비롯되곤 한다.
『영추』, 『소문』 두 책의 내용이 어떤 경우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으며 상호 모순되는 곳도 있다. 『영추』는 거칠게 처리한 것이요, 『소문』은 정교히 가공한 것이며, 『난경』은 문답을 통해 뜻을 풀어낸 것이다.
『영추』, 『소문』, 『난경』과 같은 한대 의학 문헌은 왜 의학의 기본 이론을 주로 설명하고 약물과 처방은 아주 조금 말했는가? 『신농본초경』과 『상한잡병론』은 어째서 주로 약물과 처방을 말하고 의학의 기본 이론은 아주 조금 말했는가? 양자의 경계선은 대단히 분명히 나뉘어지므로 「방기략」의 편집 체재와 분류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영추』, 『소문』 두 책은 후한 중기에 일군의 사인 의가(士人醫家)들이 후한 전 어떤 시기의 의학 문헌을 수집하고 아울러 당시의 의학 성취를 결합하여, 각각 따로 편찬하여 완성한 것이다. 『영추』, 『소문』의 최초 편집 과정은 의심할 바 없이 각각 따로 따로 어느 한 시기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양자의 문헌 성립 연대에도 의심할 바 없이 선후의 구분이 있다.

 『황제내경』이란 문헌명은 『한서·예문지·방기략』에 최초로 나타나는데 "황제내경 18권, 외경 37권"이라 기재되어 있다. 「방기략」에는 단지 채 제목만을 적었을 뿐 채의 목차가 없고 더욱이 구체적 내용에 대한 서술은 아예 없으므로 『황제내경』이 궁극적으로 어떤 모습을 한 책인지, 『황제외경』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 현재로서는 확실하게 알 방법이 없다. 그렇지만 빤꾸(班固)가 「방기략」 중에 일단의 서술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이를 최근 중국의 고고학적 발견 내용과 현존 살에 연관지어 고찰해 보면 우리는 『황제내경』이란 책의 내용에 대해 대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다.
'황제·편작의 맥서'는, 구체적인 책 이름과 저자 이름이 없던 어떤 의약 문헌의 기초 위에, 이를 정리, 통합하고 문헌명과 저자 이름을 덧붙여 만들어 낸 것일 수 밖에 없다.
환원란(文瀾)은 『중국통사간편』에서
 선왕 이후에 학사를 양성하는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어 각 부류의 학파들은 대부분 제나라에 모여들었으므로 임치는 전국시대의 문화성(文化城)이 되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단편적인 의학 문헌들은 제나라에서 수집, 정리된 후 책 이름이 정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전국시대에 제나라에서는 경전(卿田)을 세습하도록 하고 지앙스(姜氏)를 국군(國君)으로 바꾼 후로 황제를 높이 받드는 경향이 점차로 성행하여 토치자로부터 학자에 이르기까지 학자들은 한결같이 황제(黃帝)를 받들었다.
소박한 유물론과 변증법 사상을 갖춘 고대의 음양오행학이 이 시기에 직하학궁의 대학자인 쩌우옌(鄒衍)으로부터 발전되어 나왔기 때문에 제나라 임치의 사인 의가들은 자연히 가장 먼저 이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창공열전」에서,
 봄에 죽을 병인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위장에 연관된 부위가 누렇게 되어 있었는데 누런 것은 흙의 기로서 흙이 나무를 낳지 못하므로 봄에 죽을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황제와 의학 사이에 관계가 맺어진 곳은 제나라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창공열전」에,
 (꽁승 양칭이) "나 양칭(陽慶))에게는 고대의 도가 담긴 '황제편작의 맥서'가 있는데 이 책은, 오색을 통해 병을 진단하여 사람이 죽을 것인지 살 것인지 알아내며 의문스러운 부분을 해결하고 치료할 수 있는 범위를 결정하는 것으로 약에 대한 노설에까지 이르는 바 대단히 잘 다듬어져 있다. 내 맘 속으로 그대를 아끼어 우리의 금방서(禁方書)를 전부 그대에게 전해주고 싶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츠은위이(淳于意)는 그의 '맥서상하경', '오색진', '기해술', '규도', '음양', '외변, '약론', '석신', '접음양금서'를 받았습니다. 이 책들을 받고 읽고서 해석하여 시험해 본 것이 이제 삼년쯤 됩니다. 

'맥서상·하경', '오색진병', '기해술', '규도', '음양', '외변' 등은 응당 '황제·편작의 맥서'의 편명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황제내경』, 『외경』, 『편작내경』, 『외경』 등을 만들어 낸 사람은 혹시 전한 말의 시의(侍醫) 리주꾸어(李柱國)가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는 『황제내경』의 성립 기초 및 형성 과정에 대해 아래와 같은 견해를 제시한다.
① 『황제내경』의 원형은 저자명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문헌명도 없었던 고대의 의학문헌이다. 그 내용은 마왕퇴에서 출토된 『음양십일맥구경』, 『맥법』, 『음양맥사후』 또는 장가산에서 출토된 『맥서』에 상당한다. 양칭(陽慶)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 "고대의 도가 담긴" 것들이고, 그렇다면, 아무리 늦어도 전국 중기의 저작이다.
② 기원전 2세기 전후에, 구체적인 문헌명이 없었던 "금방서"가 먼저 제나라의 수도인 임치에서 황제와 관계가 맺어졌다. 통틀어 "금방"이라고 일컬어지던 약간의 단편 의서의 기초 위에 제나라 의사들의 종합을 거쳐 "황제, 편작의 맥서"가 이루어졌다.
③ 기원전 6년 전후, 시의 리주꾸어가 다시 "황제, 편작의 맥서"의 기초 위에 『황제내경』, 『외경』과 『편작내경』, 『외경』 등의 저작을 교감, 정리해내었다.
④ 『황제내경』은 경락학설을 위주로 하고 아울러 음양오행을 이론적 기초로 한 위에 진단·치료까지 취급한 의학이론서 성격의 저작이다. 이 책은 단일 편으로부터 다수의 편에 이르러 최후로는 81편으로 확정되는 변화발전 과정을 거쳤다.
⑤ 중국의 의학문헌이 대대로 실전(失傳)되고 대대로 보충되었지만 의학의 정수 부분은 시종 실전되지 않았다.

 『영추』는 인체의 생리, 병리, 진단, 치료, 섭생 등 문제에 대해 전면적으로 논술하였고 장부, 정(精), 기(氣), 신(神), 혈(血), 진액(津液)의 기능과 병리 변화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였다. 경락이론과 침구요법에 대해서는 더욱 자세하게 되어 있어 전체 81편의 논문 중에 60여편이 침구·경락을 논한 것이다. 이 책은 침구·경락 학설의 발전 기초를 확립한 책이다.
『영추경』이란 문헌명의 변천은 대체로 2개 과정을 거치고 있다. 첫째는 『구권』으로부터 『침경』에 이르러 『영추경』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둘째는 『구권』으로부터 『구허(九虛)』, 『구령(九靈)』에 이르러 『영추경』으로 이르는 과정이다. 『영추경』이란 문헌명은 도가의 손에서 나온 것 같다.


『소문』의 첫 부분은 운기칠편(運氣七篇)과 「자법론」, 「본병론」 2편을 제외한 72편의 논문이다. 이 논문들은 분명 『소문』 성립시의 주요 내용일 것이다. 둘째 부분은 왕삥이 보입한 운기칠편이다. 셋째 부분은 북송의 리우원수가 보입한 「자법론」과 「본병론」이다.


  1. 倉公의 이름은 ‘淳于意이다. 『史記』에 실린 진료카드형식의 수많은 치험례는 고대 의학의 상태를 아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