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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Paul Meant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자유하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율법 없는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그리스도께 율법 아래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된 것은 어찌하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라. 내가 복음을 위하여 이것을 행함은 너희와 함께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고자 함이라.

 오만한 성령파가 과감한 혁신책을 도입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그가 책망 받아야 했으므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사람들이 오기 전에 그가 이방인들과 함께 먹었으나 그들이 오매 할례자들인 그들을 두려워하여 그가 뒤로 물러가 자신을 분리하였으며 다른 유대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행하고 심지어 바나바도 그들의 위선에 끌려갔느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두 가지 율법 ─ 즉, 모세에게 주신 유대교의 율법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에게 주신 자연법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바울이 예수와 함께 믿은 것은 예언자들의 주장이 성취되어 심령의 종교가 외형적 (율법) 준수의 종교를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유대교 율법의 핵심 가치를 유지했다. 예수와 바울 모두에게 그것이 확인된다.
온 율법은 이것 즉,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한 말씀 안에서 성취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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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그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라. 이것이 율법(law)이요, 대언자들(prophets)이니라.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설립하지 않았고 바울은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지 않았다.

 루터는 죄인 개개인의 내면적 투쟁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했지만 바울은 민족들 전체의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사고했다. 바울의 메시지는 언제나 자신의 ─ 그리고 예수의 ─ 혈족에 관한, 혈족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성도들을 위한 모금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의 교회들에 지시한 바와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주(week)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대로 주께서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뜻한 바는 다른 사람들은 편안하게 하고 너희는 짐을 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균등의 원리를 따르려는 것이니 곧 이제 이번에는 너희의 넘치는 것으로 그들의 부족함을 공급하고 또한 그들의 넘치는 것으로 너희의 부족함을 공급하여 균등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것은 기록된바,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더라(출 16:18), 함과 같으니라.

 예수의 진정한 의미는 바울의 복음에서, 복음서들이 기록되었던 디아스포라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유대인들로부터 마흔에서 하나 뺀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몽둥이(rods)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을 당하여 한 밤과 한 낮을 깊음 속에 있었으며 자주 여행하면서 물들의 위험과 강도들의 위험과 내 동포로 인한 위험과 이교도들로 인한 위험과 도시에서의 위험과 광야에서의 위험과 바다에서의 위험과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을 당하였고 또 지치고 아프고 여러 번 밤을 새우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금식하고 추위를 당하고 헐벗었노라.

타키투스의 연대기 (Annals, 15.44)
 네로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대용할 범죄자를 찾아내, 그들을 가장 원시적인 갖가지 형태의 극형에 처했다. 이들은 통속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었는데, 혐오스러운 행위 때문에 미움을 받는 집단이었다. 그들은 티베리우스 황제 치하 때에 총독 빌라도에게 처형당한 그리스도라는 사람에게서 그 이름을 땄다.
 이 나쁜 미신은 이렇게 해서 한동안 억제되었으나 나중에 또 다시 발생했다. 혼란의 근원인 이것은 단지 유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 도시에도 일어난 현상이다. 이 도시에는 이국적이거나 역겨운 모든 것들이 흘러 들어와서 추종자를 만든다. 처음에는 공공연히 행하는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들의 내부 밀고로 엄청난 무리가 체포당했다. 죄목은 불을 지른 것뿐만이 아니라 인류 사회의 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처형은 일종의 대중적 오락거리가 되었다. 그들에게 짐승 가죽을 씌워 꿰맨 다음에 개들이 그들을 물어뜯도록 내던졌다. 또는 어두워진 후에 그들에게 불을 붙여서 등불로 사용하게 했다.
 네로는 자신의 정원을 그런 전시장으로 바꾸었고 서커스에서 그들을 노리갯감으로 삼았다. 거기서 네로는 전차 모는 사람으로 분장하여 군중 속에 끼었다 ─ 그래서 희생자들이 극형을 받기에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정하는 반응들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가학망상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용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경쟁적 감정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형제살해를 일으켰다. 경쟁심으로 조상 야곱은 자기 형 에서가 있는 자리를 피하여 도망갔다. 경쟁심은 요셉을 죽음의 위험 속에 몰아넣고 종살이를 하도록 팔려가게 했다. 경쟁심은 모세에게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 하는가?" 하고 자기 동족이 물었을 때, 모세가 바로 왕에게서 도망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경쟁심 때문에 아론과 미리암은 진영 밖으로 추방당했다. 경쟁심은 다단과 아비람을 산 채로 하데스로 데려갔는데, 그들이 모세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에 분열의 씨앗을 심었기 때문이다. 경쟁심 때문에 다윗은 타국인들의 원한을 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에게 추적을 당했다.
 옛 사례들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이제 우리는 근래의 영광스러운 수상자들에게 눈길을 돌리자. 우리 시대의 모범을 보기로 들어보자.
 경쟁심 때문에 베드로는 한두 가지가 아니라 수많은 시련을 당했으며, 증인으로서 자신의 목숨을 바치고 영예로운 지위를 얻었다. 경쟁적 투쟁에서 바울은 인내의 상패를 거머쥐게 되었다. 감옥에 일곱 번이나 갇혔고, 도망을 다녀야 했고, 돌에 맞았지만, 동방과 서방 양쪽에서 신앙의 전령이었던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믿음과 가르침으로 뛰어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서방 세계의 끝에 도달한 후에 당국에 자신의 생명을 증거로 제공하고 이 세상을 피하여 인내의 원형인 신성한 경지에 들어갔다.(제1 클레멘트 편지 4-5장)

 바울적 "겸손" 에서 종종 발생하는 오만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지혜(1.101)
종교는 우리에게 해악을 끼치는 데 너무나 위력적이다.
 종교는...왜냐하면 예수와 바울은 둘 다 종교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율법의 외형적 준수나, 성전이나 교회, 성직계급 또는 성직자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내면적 사랑의 문제라고 말했다.

형제들 자매 성도들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우리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나 모두 한 성령에 의해 침례를 받아 한 몸 안으로 들어왔으며 모두가 마시게 되어 한 성령 안으로 들어왔느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그들 사이에는 위계 제도가 없었다.
복음 :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계시
전도하다
모든 민족들이 깨달아서 믿고 순종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언자들의 글로 환히 공개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모든 이방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이제는 밝히 드러났으며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자들의 성경 기록들을 통해 믿음에 순종하게 하려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게 된 신비의 계시에 따라 너희를 굳게 세우실 분

 믿음은 교회가 확립한 명제나 교리 그리고 규범에 대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에 대한 능동적인 반응, 그분에 대한 신뢰이다.
 루터는 야고보서 2장 20절의 "행함이 없는 믿음은 쓸모없다" (그러나, 오 허무한 사람아, 행위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인 줄 네가 알고자 하느냐?) 는 말씀을 삭제하고 싶어했다.
 하나님을 알라고 요구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알아주실 것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종노릇 하려 하느냐?
내성적인 개인주의를 반영한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창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진해서 된 것이 아니요, 소망 중에 그것을 복종하게 하신 분으로 인한 것이니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또 전체 창조물이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관직이 아니라 기능
선교 단체에서 다른 선교 단체로 파송
기능을 행사하도록
그 어느 누구에게도 통치하는 역할은 맡겨지지 않았다. "사제들(priests)" 이라는 말은 전혀 나타나지도 않는다.

17세기 영국 청교도 혁명 때에 나타났던 평등주의 운동단체로서, 사유재산 제도의 폐지를 제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