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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퍼즐 The Jesus Puzzle 2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스

CE 107년쯤에 이냐시오스가 처형당하려고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에 씌어진, 그의 일곱 편지 어느 곳에서도, 예수의 가르침이나 기적의 한 가지도, '빌라도 치하의 수난'의 그 어떤 세부사항도 인용되질 않는다.
 
로마의 클레멘

 이냐시오스보다 10년쯤 전에, 「클레멘스 1서」(1 Clement)라고 알려진 서간이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로부터 코린토의 공동체로 보내졌다. 뒷날의 전승은 그 필자를 1세기 말 무렵의 로마 주교, 클레멘스로 확인했다. 그 편지는 으레 CE 96년쯤으로 연대 추정 된다.
 13장에서, '클레멘스'는 말한다 :
 
 "특히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그분께서는 상냥함과 인내를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로워져라. 그러면 너희도 자비를 얻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너희가 행하는 대로, 너희에게도 그렇게 행하여질 것이다. 너희가 주는 대로, 너희에게도 그렇게 주어질 것이다. 너희가 심판하는 대로, 너희도 그렇게 심판받을 것이다. 너희가 상냥한 대로, 너희에게도 상냥함이 베풀어질 것이다. 너희가 무슨 되로써 측량하여 주든 간에, 너희에게도 그렇게 되질될 것이다.'"

 비록 이 정서들의 대부분이 공간 복음서들에서 발견될 터일지라도, 어느 곳에서도 이처럼 한 블록으로 나타나질 않는다. 클레멘스는 표현을 바꾸거나, 아니면 아마 집필된 복음서에서 기억나는 대로 적고 있을까?
 클레멘스는,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나 루카 복음서의 '평지 설교'(the Sermon on the Plain)에서 제시된, 같은 성질의 '예수의 생각들'을 잘 몰랐음에 틀림없다.
헬무트 쾨스터(Helmut Koester, Ancient christian Gospels, p.15)는, '아마 클레멘스의 출처는 집필된 복음서의 어떤 판본보다는 구전이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스

 스미르나의 주교 폴리카르포스는 이냐시오스의 친구로서, 그보다는 반세기쯤 더 오래 살았다. 현대 학자들의 추론이 옳다면, 그는 CE 155년에 순교했다. 폴리카르포스의 유일한 현존 서간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부분(13장)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맞은 이냐시오스의 최후를 알기 전에 씌어졌고, 다른 부분(1~12장)은 얼마간 후에, 아마 25년쯤 지나서 씌어졌을 것이다.[각주:1]
 저렇듯 느지막이도, 폴리카르포스는 집필된 복음서를 잘 몰랐던 것 같다. 2 : 3a에서 그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을 거론한 다음, 「클레멘스 1서」 13장에서 발견되는 격률 묶음의 일부를 쭉 인용한다. 이 인용은 도입 구절과 아울러, 복음서로부터가 아니라 클레멘스의 편지로부터 빌려 온 것으로 인정된다.
 쾨스터(op. cit., p.20)는 마태오 · 루카 복음서의 어구와 일치하게끔 폴리카르포스가 「클레멘스 1서」의 본문을 "바로잡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 일치는 적어도 그 대목의 절반에 대해서는 해당하지 않으므로, 나머지 "바로잡은 것들"은 한낱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든다.
쾨스터는 인정한다(op. cit., p.20) : "폴리카르포스가 이 문서들에 대해 '복음'이라는 용어를 전혀 쓰지 않는다는 점은, 그리고 예수의 말씀들이 여전히, 마치 구전에서 끌어온 것처럼 인용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바르나바의 편지

 「바르나바의 편지」는 CE 90~125년 중의 어딘가로 연대추정된다.
 클레멘스 및 폴리카르포스와 마찬가지로, '바르나바'도 예수의 수난을 묘사하고자 할 때(5:2, 5:12~14), 끌어올 만한 문서나 전승을 갖고 있지 않다. 바르나바는 '예수가 땅 위에 잇엇다'(5 : 10~11)는 데 대해 다른 초기 교부들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지녔으나, 저 성육신에 관해 말할 만한 실질적인 내용은 거의 갖고 있지 않다.
 5 : 9에서 그는 '그리스도가 사도들을 뽑았었다'고 말하지만, 복음서들에서 그려진 바와는 달리 저 사도들을 묘사하면서, 그들을 "극악한 종류의 죄인들"이라 부른다. 이것은, 그가 출처를 밝히지 않은 한 말씀, "그분께서는 성도들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셧습니다"에 근거하는 듯싶다. 이 말씀은 마르코 2: 17에서 예수의 입에 올려져 있지만, 거기에서는 예수의 일반 청중에게 적용되었지, 자신의 사도들에게 적용된 말씀이 아니다. 
사도교부들이 복음서들의 기본 내용을, 특히 수난에 관해서는 캄캄하게 몰랏다는 점은 그러한 복음서들 및 그것들의 유포가 뒷날의 현상임을 암시할 것이다.
 

  1. P. N. Harrison, Polycarp's Two Epistles to the Philippians를 보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