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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문화

"한국 감독은 홍상수, 김기덕, 임권택, 이창동뿐인가?"

[인터뷰] 파리 '한-불 영상제'를 만드는 사람들
06.05.01 20:33 ㅣ최종 업데이트 06.05.02 18:57  박영신 (jocaste)

▲ 제5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작을 발표하는 공식 기자회견이 지난달 20일 파리 오페라 부근의 그랜드호텔에서 열렸다. 왼쪽부터 티에리 프레모 칸 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질 자콥 조직위원장, 꺄트린 데미에 사무국장.
ⓒ 박영신

"한국에 영화 감독이 홍상수·김기덕·임권택·이창동뿐인가? 그들과 '다른 영화'를 하는 이들도 많은데 왜 프랑스에서는 늘 같은 이름만 보나?"

파리에 새로운 한국 영화제가 생긴다. 기존의 한국 영화제와는 '다른' 영화제라고 하는 쪽이 좋겠다.

이 영화제는 우리가 지금까지 봐온 스타 감독 중심의 영화제가 아니다. 한국은 물론 프랑스인들의 대화 속에 오르내리는 '저명한' 감독은 제외된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재능있는 신예를 발굴해 그들에게 관객을 찾아주는 것이 그 목적.

외교 차원을 떠나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영화'를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한-불 영상제 2006'이 그 주인공으로 오는 12월 7일~11일까지 5일간 샹젤리제에 위치한 '에스빠스 피에르 가르뎅'에서 만날 수 있다.

한국인이 프랑스 영화를, 프랑스인이 한국 영화를 심사한다

프로그램이 흥미롭다. 한국과 프랑스 양국의 프로그래머가 자국에 숨겨진 영화를 1차 선별한다. 영화제가 시작되면 선별된 영화를 두고 한국과 프랑스 각각 5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이 상대국의 영화를 '교차' 심사하는 이른바 '교차된 시선'이 주제. 이른바 세계 최초의 '교차' 영화제다.

프랑스의 유력 영화 전문 비평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인 장-미셸 프로동이 심사위원단을 지휘하고, 부산 국제영화제 김동호 위원장을 중심으로 배우 윤정희, 피아니스트 백건우 들이 조직위원회를 이룰 '한-불 영상제 2006'은 할리우드에 대항하는 유럽의 중심 프랑스와 아시아의 중심 한국의 극적인 만남이라 할 수 있다.

내년 2회 때부터는 서울과 파리 동시 개최라는 발칙한 포부를 숨기지 않는 '한-불 영상제 2006'은 이미 서울영화제, 클레르몽-페랑 국제단편영화제와 자매결연을 체결한 상태다.

지난달 23일, '한-불 영상제 2006'을 준비하는 집행위원회 차민철(35) 사무국장과 이상훈(35) 수석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파리 3대학에서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차씨는 현재 파리에서 다큐멘터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파리고등영화학교(ESEC)에서 영화 연출을 공부한 이씨는 프랑스 영화제작사 '엠페아(MPA)'에서 연출, 한국의 한 제작사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일한 바 있다.

둘의 인연은 재불 영화학회에서 시작됐다. 재불 영화학회는 지난 1993년 10월 20일~1994년 2월 21일까지 4개월에 걸쳐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개최된 프랑스 최초의 한국 영화제를 계기로, 영화제를 준비한 프랑스의 한국인 영화학도들에 의해 1994년 태어난 영화 단체.

3년 전부터 '한-불 영상제 2006'을 준비했다고 말하는 두 사람은 그래서 하고 싶은 말도 많아 보였다. '젊은 그들'이 보는 '프랑스 속의 한국 영화와 한국 영화제' 이야기를 들어보자.

"아키라는 '일본 대표 그 이상', 임권택은 '한국 대표'"

▲ 차민철 사무국장
ⓒ 박영신
- 생소한 이름, '한-불 영상제 2006'을 기획하게 된 동기는?
이상훈 수석 프로그래머(이하 이상훈) "현재 프랑스에서 열리는 한국 영화제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다. 한국영화가 프랑스에서 갖고 있는 위치가 뭔가. 어떤 근거 없이 두루뭉술하게 뭉쳐진 한국영화제가 여기저기 개최되는 현실은 한국인들에게 마치 한국영화가 잘 되고 있다는 거짓 인상을 주고 있다."

- 한국영화가 호응받고 있지 않나?
차민철 사무국장(이하 차민철) "눈높이를 낮추면 나름대로 그렇다. 우리가 후진국이라는 전제 하에 그 정도의 평가에 만족한다면 잘 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 영화사에서 한국영화를 말하려면 아직 멀었다."

이상훈 "프랑스에서는 일정한 영화를 보는 부류가 있는데, 그 대상은 아시아 영화도 아닌 제3세계 영화다. 1998년 이후 한국영화가 활성화 되면서 그 전에는 중국·일본·대만 영화가 있던 자리를 우리가 차지하게 된 거다. 아니, 한국이 들어선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은 그들과 같은 연장선상에서 아시아를 보지 않는다. 할리우드에 대항할 우국을 찾는 것이다. 할리우드를 감안하지 않고 동등한 입장에서 보면, 한국영화는 존재 가치가 없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같은 줄다리기 속에서 우리가 혜택을 받고 있다고 할까.

때문에 이 상태가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지금 한국영화들이 프랑스에 무작위로 들어오고 있고 더불어 임권택·김기덕을 비롯한 몇몇 감독들의 회고전이 치러지는 것이 유행과도 같아 불안하다. 그러나 영화는 유행이 아니다. 감독이 남아야 한다."

차민철 "단적으로 구로자와 아키라와 임권택은 다르다. 아키라는 단순히 일본영화의 대표주자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다. 반면 임 감독은 한국영화의 대표주자일 뿐이다. 수명이 짧다. 그 점에서 김기덕 감독이 놀라운 거다. 김 감독은 한국이라는 국적과 관계없이 작가로서 최소한의 주목은 받고 있다."

이상훈 "외교가 아닌 영화로서 김수현·노동석·박찬옥·이윤기·임순례·장률·전수일·조창호 등 프랑스에 알려지지 않은, 진정 재능있는 작가를 한 번 소개해 보자는 생각이랄까. 한국 내에서 일차적인 검증을 통하지 않고 프랑스의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면 뭔가 다른 비평이 나올 것이고, 그런 비평들이 한국 영화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 기대한다. 새로운 감독들에게 주어질 기회의 징검다리가 되어 보자는 기대다."

"'프랑스영화=수다스러운 누벨바그?' 최근엔 뤽 베송?"

차민철 "반대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 프랑스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나. 1980년~2000년대까지는 프랑스 영화의 공백기로 알려졌다. 내세울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젊은 프랑스 영화>(르네 프레달)라는 책을 들춰보면 이게 오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찾아보니까 있더라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이 아는 프랑스 영화는 수다스러운 누벨바그 뿐이다. 그조차도 마니아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프랑스 영화 역사에서 누벨바그가 전부인가. 최근 영화는 뤽 베송밖에 없다고? 그렇지 않다. 한국에 들어가는 프랑스 영화조차도 스펙트럼이 매우 협소하다. 결국 양국 문화의 지한파, 지불파들이 그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들만 고르는 것이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이상훈 "프랑스 영화도 크게 보면 상업영화, 예술영화의 두 부류로 나뉘어진다. 한국과 다른 점은 예술영화의 구도가 잘 돼 있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영화계에서 프랑스 영화를 보는 눈이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부하지만 영화는 현실을 반영한다는 말이 있다. 프랑스 영화가 다루는 프랑스의 시선은 공정하지 않다. 이를테면 화려한 에펠탑의 지붕 아래 금발 백인들만 사는 곳이 프랑스인가? 프랑스 내에 아프리카나 마그레브인들이 많이 살고 있고 그들의 문화가 깊숙히 들어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미미하게 다뤄진다. 소외된 이민자들에게 카메라를 맞춘 <레스키브>(2003, 압델라티프 케시시)와 같은 영화도 왕성하게 제작되고 있다. 한국에서 볼 기회가 없을 뿐이다."

"프랑스 한국영화제, '한국'만 있고 '영화'가 없다"

- 그러나 심사위원의 면면을 보면 양국의 영화가 결국 이국주의적 판단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는데.
이상훈 "그런 경향은 있으나 일단 1차 선별은 우리가 한다. 프랑스 영화는 프랑스인 프로그래머가 고르고 한국 영화는 한국인 프로그래머가 고른 후, 선정된 한국 영화는 프랑스인 심사위원이 프랑스 영화는 한국인 심사위원이 다시 한 번 심사하게 된다. 심사위원 이전에 양국 프로그래머의 선택이 이미 존재하므로 우리는 이것을 '교차된 시선'이라 부른다."

- 현재 프랑스에서 열리는 한국 영화제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뭔가?
이상훈"영화제가 영화제로 존재하지 않고 한국을 알리기 위한 '한국 주간'에 머물고 있다는 게 문제다. 영화제 성격상 프랑스에 소개되는 한국영화도 이에 적합한 것들이며, 영화제를 찾는 관객들도 한국을 알고자 하는 기대로 몰려든다. 영화가 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구로 전락하니 한국의 좋은 면만 보여주고 싶은 건 이해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의 진짜 모습이 아닌 것 같다. 한국영화가 한국인으로서 자긍심을 키우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차민철 "영화를 이야기하는데 '국가'를 두고 평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한-불 영상제 2006'도 물론 한-불 양국의 영화를 표면에 내세웠다는 점은 인정하나, 이 방식을 택한 것은 이미 존재하는 현상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다.

내용 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은데 나는 형식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본다. 한국영화가 프랑스에 와서 영화제의 틀 안에 들어가는 것은 두 가지 형태다. 도빌 아시아영화제와 같이 이미 존재하는 프랑스의 영화제 속에 한 섹션으로 들어가거나 한인협회같은 단체가 한 작가를 불러서 회고전을 하는 형식이 그것이다.

현존하는 프랑스의 한국 영화제에서 보여지는 한국 영화는 김기덕·이창동·임권택·홍상수, 단 4명뿐이다. 한국 영화계에는 이 4명의 감독밖에 없나? 이들의 영화를 상영하는 프랑스 내 한국영화 행사들은 늘 회고전이다. 그리고 이 회고전을 찾는 프랑스 관객은 프랑스인이지만, 이미 반은 한국문화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 어떤 동기로든 한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찾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게 왜 나쁜가.
차민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관객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관객만 있는 것이 문제다. 이제는 여기에 보태진, 뭔가 다른 것이 필요하다."

▲ '한-불 영상제 2006' 개·폐막식이 열릴 샹젤리제 에스빠스 피에르 가르뎅의 뤼미에르관(740석) 내부 전경.
ⓒ 박영신
"한국 감독들, 칸 수상 그만 꿈꾸시라"

- 더 보태져야 한다는 말은 이미 그 제반 여건이 형성됐다는 말 아닌가. 회고전을 통해 소위 좁은 관객을 겨냥하면서 만들어진 여건이다.
차민철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은 맞다. 그러나 일정한 여건이 만들어진 상황에서 어떤 상승 요인을 노릴 때는 변화된 컨셉트에 따라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 한국영화는 '여러분이 보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할리우드의 그 수많은 영화들보다 더 많은 것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아직 못하고 있다. 늘 임권택·홍상수밖에 없다. 그 분들은 계속 작업을 하시겠지만 이 위에 우리가 하나를 더 하자는 말이다.

태권도·불교·영화 등 관광공사의 3대 한류상품 중 하나가 영화다. 결국 영화는 한국의 문화관광상품 중 하나였을 뿐이다. 좋은 전략이긴 했으나 이런 식으로 한국 영화를 계속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을까.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인 감독'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감독들 중에 아직은 그런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훈 "국적을 떠날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우리는 아직 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키아로스타미나 모흐센 마흐발마프도 일종의 스타 시스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차민철 "그렇지만 다르다. 키아로스타미는 '이란인 감독'이라 말하지 않는 반면 한국은 외교적인 일에 너무 얽혀있다.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부술 때가 왔다. 영화를 말하면서 왜 영화가 아닌 한국에 방점을 찍나."

이상훈 "처음에는 물론 한국에 방점을 찍었기 때문에 먹혀들기도 했으나 이제 이 정도면 됐다. 물론 저변이 문제라고는 하지만, 저변이 완벽하게 형성될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다. 무작정 기다리다보면 그나마 우리가 가진 자리를 다른 나라에 내줄 수밖에 없다."

차민철 "한국은 영화를 영화로 보지 않는다. 영화 한류라는 것은 말이 안 될 뿐더러 한류라는 것도 참 이상한 현상이다. 유행은 다른 것에 자리를 남긴다는 것, 즉 '지나감'을 전제한다. 유행이 아닌 영화로 문화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 비록 유행은 지나가더라도 감독은 남아야 한다.

임권택·홍상수 등 우리가 현재 한국 영화계의 스타 시스템을 비판한다고는 하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문제 제기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비판도 가능하다. 어느 정도 작품을 하면 무작정 해외 영화제를 겨냥하는 것도 우리가 가진 병폐 중 하나다. 우리나라 감독들의 꿈이 칸 영화제 수상이라는 말을 들은 바 있다."

"스필버그보다 거장 같아진 박찬욱"

-2000년 이전에는 해외 영화제를 통하지 않으면 우리 영화가 해외에 소개되기가 힘들었다. 바로 그런 점이 해외 영화제에 집중하도록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상훈 "그런 점도 있긴 했으나 최근에는 물욕이 아닌 개인의 명예욕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내 영화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한국에는 나를 인정할 만한 분위기가 안 돼. 한국에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누군가가 나를 인정해줘야 돼.' 그래서 칸으로 칸으로 간다. 여기서 비판하는 스타 시스템의 문제는 이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비판을 하나.
이상훈 "일례로 박찬욱 감독은 나름대로 프랑스에서 성공을 했다. 그러나 그 후 박 감독이 한국에서 뭘 하든 간에, 이 곳에 있는 사람들조차 눈치를 챌 만큼 사람이 바뀌어 버린다면 박 감독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영화 감독 하나를 키워주고 싶어도 이것이 전례가 되는 것이다.

쿠엔틴 타렌티노와 박찬욱 감독의 관계를 아는 배급사 '메트로폴리탄' 관계자의 말을 빌면 '타렌티노는 <저수지의 개들>(1992)을 갖고 전세계를 돌았다'고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새 영화가 나올 때마다 파리를 방문하고 관객을 만난다. 박 감독은 <올드보이>(2003)로 성공한 후 <친절한 금자씨>(2005) 프랑스 개봉 때 초청했는데 안 왔다더라."

차민철 "<올드보이>는 칸 수상 전 필름마켓에서 독립배급사 '와일드 사이드 필름'과 거래가 이뤄졌다. '와일드사이드필름'은 박 감독의 다음 작품도 함께 하고 싶어했으나, <올드보이>가 성공하자 <친절한 금자씨>는 초대형 다국적 배급사인 메트로폴리탄으로 넘어갔다. 독립 배급사는 버려진 것이다.

<올드보이>가 대박을 터뜨리면서 <친절한 금자씨>의 가격이 치솟자 배급사를 옮긴 건데 와일드사이드필름이 박찬욱의 '의리'를 문제삼는다면 할 말 없는 분위기였다. 메트로폴리탄 배급 담당자를 만났더니 '박찬욱은 스필버그보다 거장이 된 것 같다'고 비아냥거리더라.

봉준호 감독이 프랑스에서 대체로 호평을 받은 반면 박찬욱 감독의 평가는 천차만별이었다. 2004년 5월 17일자 <리베라시옹>은 <올드보이>를 가리켜 '맥빠진 스릴러', '피로가 몰려오는 영화'라고 했다. <르몽드>는 '이제 박찬욱의 트릴로지가 끝날 때가 됐다'고도 했다."

- 한 영화인의 인격이나 윤리를 가지고 한국 영화를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상훈 "맞다. 그러나 칸 수상 전후가 달라지니 이곳의 배급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영화가 좋다면 물론 배급사 관계자들은 계속 한국영화를 수입할 것이다. 돈이 된다면 공사는 구별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안 되는 거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한국영화의 과도한 스타일, 극단적인 폭력이 식상하다."

"<왕의 남자> 1200만 관객 돌파, 난 부끄러웠다"

▲ 이상훈 수석 프로그래머
ⓒ 박영신
- 오늘날 작가를 정의할 때 스타일이 기준이 되고 있기도 한데.
이상훈 "경향이라든가 성격이 아니라 자체가 스타일인 영화를 만들어낸다. 이 때는 '스타일'이 아니라 '스타일리시'다. 최근에 우리가 본 스타일리시한 영화 중에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2004)이 있다. 어떤 주제, 시간적 배경을 막론하고 모조리 스타일리시해져 버린다. 그 시대에 우리는 스타일리시하지 않았다. 영화적 장치라고 볼 수 있지만 쉽게 말해 이것은 '내 영화의 좋은 점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에 다름 아니다."

- 극단적 폭력으로 말하자면 차라리 김기덕 감독 아닌가. 김 감독은 불행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을 연상시킨다.
이상훈 "김기덕의 영화에는 처음 먹은 생각대로 밀고나가는 힘이 있다. 주제넘은 말이지만 이것은 제자리에 앉아 선생님 말 잘 들으면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힘이다.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영화 산업 월간지 <르 필므 프랑세>는 매년 2월 전년도 영화 흥행 실적을 집계한다. 지난해 2월호를 보면 총 610편의 영화가 개봉된 가운데 <올드보이>가 14만301명,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김기덕)이 22만 5천 62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김 감독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성공했다 할 수 있는 <봄 여름…>은 김 감독 개인의 영화적 힘이라기 보다 프랑스인이 가진 엑조티즘(이국주의)의 덕을 본 것이라 아쉽다.

영화에서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다. < B형 남자친구 >(2005, 최석원)가 왜 나쁜 줄 아나. 과연 한국의 젊은이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건가.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 방식이 좋은 건가. 인생은 아름다워? 내가 보는 세상이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바꿔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 현실을 가리는 영화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영화들이 계속 만들어진다면 한국사회의 우민화에 영화계가 일조하지 않았다고 발뺄 수 없을 것이다."

- 그런 영화 찍어놓고 예술가연 하지 말란 말인가.
차민철 "그건 언제부터인가 감독들이 오피니언 리더가 됐기 때문이다. 영화 감독들은 한국의 오피니언 리더이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권력자가 되는 것은 세인의 주목이 한 곳에 몰리기 때문이다. 그것을 분산시켜야 한다. 박찬욱이 국가대표는 아니다. '한-불 영상제 2006'에 박찬욱이 예선탈락인 이유다."

이상훈 "나는 개인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2003, 강제규)를 보다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 영화에서 남북이란 게 도대체 뭔가. 남북 분단이 일부 영화 감독들의 돈 벌이에 이용된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그렇게 함부로 다룰 주제인가. '내가 한국을 이렇게 찍었다, 할리우드에 간다'고 자랑할 일인가.

극단적으로 우리가 숨기고 싶은 것을 보여줘서 성공한 사람이 김기덕이라면, 많은 수의 한국인 감독들은 한국에서 이야기거리를 찾아 그것으로 영화계에서 먹고살고 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타인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다."

차민철 "그 뿐인가. <왕의 남자>(2005, 이준익)가 관객동원 1200만을 돌파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한 마디로 부끄러웠다. <실미도>(2003, 강우석), <태극기…>부터 떠들기 시작한 '천만 관객'의 실체가 도대체 뭔가. 우리나라 인구가 4800만이다. 인구 5천만도 안 되는 나라에서 관객 동원 1천만이 가능한가. 한국에 개봉되는 영화 편수가 적어서라기보다는 스타·영웅 만들기 등 한국 정서의 획일성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라고 자랑하는 것밖에 더 되나."

"국가·민족·인종을 초월한 한국 영화 보여주고 싶다"

- 베니스도 베를린도 아니고 칸에서 무조건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이 우리에게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칸이 올바른 시험대인지 의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한 작가의 작품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 때 상을 주는 곳'이 칸이라고 하지 않나.
차민철 "그렇다. 칸이 답은 아닌데 모두가 칸만 보고 있는 것이 답답하다. 칸이 다른 어떤 영화제보다 시스템이 잘 돼 있다는 건 인정한다. 그러나 프로그램의 질적 측면까지 보장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비유가 될 지 모르겠으나 한국의 '유한마담'들이 취미삼아 그림을 그린다. 이들이 파리에서 전시회를 한 번 하고 귀국하면 순식간에 재불 화가가 돼버린다. 칸이 여기서 얼마나 다른가. 영화는 규모가 좀 크다는 것 외에 논리나 컨셉트는 똑같다."

- 전 세계의 영화를 한 눈에 들여다본다는 칸도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영화들까지 속속들이 보여주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인맥을 통한 작품 선정이라는 비난에서도 그리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다.
이상훈 "정확한 지적이다. 칸의 경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비공식적 통로로 영화가 많이 선정되고 있다. '이제는 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불러오는 영화들이 50%라면, 나머지가 50%를 차지할 것이다. 그것이 눈에 확 뜨이는 해가 있고 잘 포장돼 식별할 수 없는 해가 있다."

- 지난달 20일, 제 59회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 19편이 발표됐는데 예상대로 난니 모레티, 페드로 알모도바르, 켄 로치 등 지난해 결석한 거장들의 작품이 대거 선정됐다. 그리고 한국 영화는 실종됐다.
이상훈 "<용서받지 못한 자>(2005, 윤종빈)가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되긴 했으나 한국영화가 경쟁부문에서 빠진 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전체 경쟁부문에서 아시아영화는 중국영화 <여름궁전>(2006, 로예) 단 한 편뿐 일본영화의 흔적도 없다. 앞서 언급한 칸의 헛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세계영화의 고른 참여'를 표방한 올해의 칸 경쟁부문에 한국 영화가 없는 것은 한국영화계의 보랏빛 환상에 일침을 가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올해 초 베를린영화제에도 한국영화는 없었다. 스크린쿼터 제도를 기반으로 세계의 유수 영화제 수상에 도취돼 국내외적으로 한국영화의 성황을 목청껏 외치고 있는 이때, 한국 영화계가 열망하는 칸에서 보여준 올해의 초라한 성적은 한국 영화의 오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제는 몇 년 후 한 나라의 영화시장을 짐작케 하는 척도라 할 때 올해의 칸과 베를린은 한국 영화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바로 이런 때 현재 스타 감독과 더불어 새로운 감독들의 해외 진출이 시급한 것이다.

- 결국 '한-불 영상제 2006'이 제기하는 문제는 지금까지의 관행을 바꾸는 것인가
이상훈 "쉽게 말하면 감춰진 영화를 발굴하고 그 영화들에 관객을 찾아주는 것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기존에 보아온 그림 속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사는 이국적인 사람들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라 한국에도 사람 냄새 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프랑스와 한국의 주어를 바꿔도 성립되는 바람이다. 국가·민족·인종을 초월한 영화를 보여주고 싶다."